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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버텨 낸 방초정과 정양공 사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102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경호

[6·25 전쟁의 발발과 피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6월 27일 서울까지 진격해 온 북한 인민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31일에는 김천 근교까지 내려왔다.

이날 인민군 선봉대는 무주에서 산을 타고 구성면 송죽동 궁장으로 넘어와 이곳을 지키고 있던 충청북도 경찰과 미군을 습격하였다. 김천 지역에 대피령이 내려진 것은 8월 1일로, 이날 시내 각 기관과 일부 주민들이 대구로 피란을 떠났고, 대다수의 주민들도 집 안에서 모시던 조상 신주(神主)를 몰래 매장해 놓고는, 중요한 문서를 비롯하여 식량 및 옷가지를 챙겨 피난길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포화도 견뎌 낸 방초정과 정양공 사당]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인 6·25 전쟁은 원터마을에도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당시의 무수한 포탄과 총탄은 마을의 역사를 한순간에 없애 버릴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했다. 마을 어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원터마을 역사에서 물리적인 변화를 야기한 가장 큰 사건은 6·25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방초정정양공 사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집들이 파괴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한편, 파괴된 주택들은 1953년에 정부의 난민 정착 기금을 보조받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다음은 전쟁 당시의 사정을 직접 보았거나 어른들에게 들었던 것을 기억하는 권진순[1923년생] 씨가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에게 6·25전쟁은 너무도 큰 사건이었다.

“하루 저녁에 뺄갱이가 저쪽에서, 성주 쪽에서 넘어온다고 소문이 나더라고. 뺄갱이가 뭐신가, 뭐 봤어야지 알지. 빨간 옷 입은 사람인가 했다니까. 나중에 알아보니까 이짝 너머 동네에서 숨어 가지고 있다가 밤에 요리 들어와 가지고, 우리 있는 동네로 넘어와 가지고, 지례 쪽으로 저 너머로 갔다 그러던데. 그 사람들 가다가 다 죽었을 거야. 아이고, 그때 난리도 난리도. 참 기가 막혔지. 또 미군들이 와서 뺄갱이 다 죽인다 카고. 민간인들도 뺄갱이랑 접촉한 사람들. 그 사람들 다 구덩이 파놓고 한 구덩이다가 총살 다 시키고. 돌고개 보고 저기 귀신 터라 그랬다. 사람 하도 많이 죽어서.”

피란 갔다 돌아온 주민들은 폐허가 된 집들을 보고 망연자실했지만, 그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방초정정양공 사당을 보면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권진순 씨와 이봉화[1943년생] 씨가 당시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집들이 다 타 버려서 사람들이 집을 새로 짓고. 그때 모두 살림이 없어서 죽을 고초 받았지. 폭격을 맞아 놓으니깐 식구는 많고 집은 지어야 되고. 없기는 없고. 참 힘들었지.”

“아이고, 폭격 맞고 아무도 없더라만은. 몇 집도 없고 그랬다 카던데. 그런데도 방초정은 있었다고 그러던데. 조상이 도왔는가. 재실도 괜찮고. 방초정이 그래 남아 가지고.”

이처럼 6·25전쟁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도 방초정정양공 사당만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직도 건물에 남아 있는 몇 군데의 총알 자국만이 모진 역사를 말해 줄 뿐이다.

[원터마을의 상징 방초정과 정양공 사당]

외지 사람들까지 원터마을 이름은 기억하지 못 해도 방초정정양공 사당은 알고 있을 정도로 원터마을에서 방초정정양공 사당의 존재는 매우 소중하다.

이러한 문화 자산이 원터마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을 주민들이 느끼는 자부심은 대단해 보인다.

방초정정양공 사당,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을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마을의 집들이 모두 불타 버렸을 때도 이 건물들만은 화를 입지 않았거든요. 가풍이 지켜진 것이라고 생각이 되지요.”

하지만 마을의 전통과 정신을 지켜 나가는 연안이씨 종가 사람인 이철응[1945년생] 씨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전통적인 종택의 모습을 온전하게 지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게 종택의 본디 모습이 아니잖아요. 6·25 전쟁 때 폭격이 나서 소실이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사당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우리 김천에 반촌이 여러 군데 있고 나름대로 종손이 있고 직접 종택에 상주하시면서 가풍을 그래도 이렇게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6·25 전쟁 때 폭격 때문에 종택의 위엄을 지켜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이 제일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연안이씨 종택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 모두 커다란 역경을 버텨 낸 방초정과 사당을 보면서 집안의 가풍이 지켜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렇게 어렵게 마을 주민들이 지켰던 원터마을의 전통이 영원히 남아 후세에도 계승되기를 소망한다.

[정보제공]

  • •  권진순(여, 1923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 •  이봉화(남, 1943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 •  이철응(남, 1945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연안이씨 종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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