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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C0203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해인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재민

[붉은빛으로 마을을 수놓다]

해인리 해인동에 가면 오미자 밭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옛날에 우리 콩·고추 같은 것 심었는데. 아랫마실[윗두대]에 가보니까 흔한 열매가 아니다 본께[보니깐]. 그래서 내 생각에 딴 농사 카면 안 낫겠나 싶어 시작한 거야.”

해인동의 오미자는 김석우[1934년생] 씨가 1984년경 윗두대에 사는 이기후 씨에게서 들여왔는데, 당시 김석우 씨는 오미자를 재배하여 1년에 약 500만 원[1980년대 초 직장인 봉급이 약 10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어치를 생산했다고 한다.

김성열[1954년생] 씨의 경우, 귀농을 한 후 오미자를 심을 때 오미자가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물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는 낯설고, 논에다가 그런 것[오미자]을 하는 것을 몰랐지. 하면 안 되는 줄 알았지. 그런 것 한다고 어른들 난리 나고 했었지. 나락 심는 데 그런 거 한다고. 감자 같은 거, 보리 같은 거 먹고 살 식량 같은 거[했지].”

본격적으로 오미자 농사를 짓기 전에는, 주민들은 쌀과 감자 등의 식량 작물만 지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오미자’라는 약초를 들여오고, 이 오미자가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강에도 효능이 많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의 생각도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의 내과의사 ‘오미자’]

마을 토박이 김석우 씨는 2000년대 초반 아주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는 수술해야 할 정도였고, 수술을 한다 해도 다른 합병증에 걸릴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다리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폐결핵’이라는 지병을 안게 되었다. 폐결핵은 아무리 약을 많이, 꾸준히 복용한다 해도 쉽게 증상이 누그러들지 않는 병이다.

“거기 담당 의사가 ‘다리는 세월이 흘러가면 낫는데 할아버지 평생 이 병은 못 고칩니다’ 그 캐요[라고 말해요.] 폐결핵이 됐다 카는기라. 그래서 병원에사 약을, 다리 아픈 약 주죠, 폐에 대해서 주죠, 그만큼을 먹어 재껴도[많이 먹어도] 기꾸도 안 해요[차도가 없어요].”

김석우 씨 아내 김복수[1936년생] 씨는 우연히 오미자가 기침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는, 집에서 가꾸던 오미자에 사이다를 부어서 남편한데 챙겨 주기도 하고, 오미자차를 끓여서 먹게도 하였다. 찻숟가락으로 오미자와 설탕을 똑같이 한 숟가락씩 넣고 끓는 물을 넣으면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오미자차가 완성된다. 이 오미자차를 아침식사 후 한 잔, 저녁식사 후 한 잔씩 남편에게 먹이기를 열흘 정도 하니, 그 징그럽던 기침이 귀신같이 사라지더란다.

“물을 팔팔 끓여 가지고 설탕 한 숟갈 넣고 오미자 한 숟갈 넣고, 물을 부라[부어라] 그래 부[부어] 가지고 줬지. 그래가 아침 먹고 한 잔, 저녁 먹고 한 잔, 그거 주니까 한 열흘 된게[되니] 기침이 탁 끊쳐[낫더라고]. 고마[그만] 고질[그 길]로 아직까지 기침도 끊치고[낫고] 가래도 안 해요.”

그렇게 김석우 씨의 지병이 나은 후로 김석우 씨의 아들은 물론이고 손자까지 감기만 걸려도 병원에 가기보다는 해인리로 와서 오미자를 한 움큼 가져간단다. 해인리의 오미자가 기관지가 아플 때 찾게 되는 ‘의사 선생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정보제공]

  • •  김석우(남, 1934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 •  김성열(남, 1954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해인리 향우회 총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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