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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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𥖝 |
영어음역 | Gim Ryeom |
이칭/별칭 | 여용(汝用),묵재(黙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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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성별 | 남 |
생년 | 1612년 |
몰년 | 1659년 |
본관 | 광산 |
[정의]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용(汝用), 호는 묵재(黙齋). 할아버지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이고, 아버지는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이다. 어머니는 광주이씨이며, 생부는 김광실(金光實)이다. 부인은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렴(金𥖝, 1612~1659)의 장인인 이윤우는 그의 재능과 도량을 칭찬하면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서 받은 『주역(周易)』을 주어 공부하게 하였다. 1658년(효종 9) 도산서원의 동주(洞主)가 되어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두루 하여 자세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경내 유생들을 불러 모아 퇴계 이황(李滉)의 문집을 강론할 때 풍문을 듣고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집이 좁아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으나 김렴은 예로써 대접하였다.
예안 사람들은 당시 김렴의 이 같은 행동을 칭찬하면서 미담으로 여겼다. 김렴보다 열다섯 살 아래인 갈암 이현일(李玄逸)은 김렴을 형으로 섬겼으나, 김렴은 오히려 친구로 지내기를 허락하였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죽령에 도달하였을 때 임금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평생 처사로 생을 마쳤다.
[묘소]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태자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