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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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蒔 |
영어음역 | Yi Si |
이칭/별칭 | 중립(中立),선오당(善迂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 영천(永川).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迂堂). 아버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 이덕홍(李德弘),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진사 남응건(南應乾)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시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경사(經史)를 통달하였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 향해(鄕解)에 합격했으나 어지러운 과장(科場)의 기풍이 마땅하지 않다하여 과거를 포기하였다. 집 서편 시냇가에 서당을 짓고 꾸준히 학문에 분발하여 정구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들러보고 가학을 잘 잇는다고 칭찬하였다.
평소 생활이 검소하고 몸가짐을 삼가서 평생토록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몸에 대지 않았으며, 관청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늙도록 진리 탐구에 잠심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데 이바지하였다. 원근에서 많은 생도들이 모여들었는데 제자 가운데서 문행(文行)이 있는 선비가 많이 났고 진사와 생원이 10명에, 문과에 오른 이도 6명이나 있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가 권세를 휘둘러 정국이 몹시도 흐리고 어지러울 무렵, 한갓 출세에 급급하여 권당에 발을 들인 아우가 있어 꾸짖고 타일러 온갖 방법으로 빗나가는 아우를 건지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 듣지 않자 “옛 사람은 재주로 입신(立身)을 했건만, 요새 사람은 재주로 몸과 집을 망치는구나!?”라고 개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폐모론(廢母論)으로 온통 조야가 들끓고 인심(人心)이 뒤숭숭한 판에 그 아우 한 사람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에 이시는 급히 글을 보내어 “그대가 정언(正言)이 되었다고? 바야흐로 바른말이 절실한 때이긴 하나, 그대가 과연 정언 구실을 감당할 만하겠는가? 떳떳이 할 말을 해야만 정언이라 할 것이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은 정언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몸과 집을 망치고 선대를 욕하게 하며, 윤기(倫紀)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될 뿐이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아우는 “산림(山林)에 앉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오활(迂闊)한 형”이라 하여 도리어 못마땅하게 여겼다 한다. 마침내 아우가 인조반정과 함께 화를 입자 이시는 아우를 다스리지 못한 아픔에 문을 닫고 14년을 숨어 지내다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선오당유고(善迂堂遺稿)』 2권이 있다. 이시의 글 중, 사람이 순풍에 돛을 단다면 험한 길도 쉽게 갈 수 있지만, 출발을 잘못하여 폭풍우를 만나면 배는 뒤집히고 사공은 익사한다는 국문 시조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가 유명하다.
[묘소]
우계(愚溪)에 있는 선영 곁 곤향(坤向)의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오계서원(迂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이광정(李光庭)이 유사(遺事)를 짓고, 류심춘(柳尋春)이 행장을 지었다. 후학들이 이시의 학행을 기려서 『오계서당동화록(迂溪書堂同話錄)』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