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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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太師-位牌- |
영어의미역 | Angeumi Who Defended Three Great Teachers's Ancestor Tablet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옥정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정현 |
[전설]
경상북도 안동시 옥정동에서 삼태사의 위패를 지킨 안금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1년 경상북도 안동시 옥정동에서 주민 권재영(남, 66)이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같은 해 일조각에서 출간한 『한국구비전설의 연구』에 수록하였다. 이후 1983년 한국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설화의 유형적 연구』와 1984년 안동군에서 출간한 『내고향 전통가꾸기』, 그리고 1991년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과 1999년 안동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동시사』에 재수록하였다.
[내용]
임진왜란 때 안동 태사묘의 묘지기로 있었던 안금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피난을 갔는데, 안금이는 삼태사 위패를 들고 길안면의 국란이라는 곳에 숨어 들어갔다.
국란이라는 곳에 피난 간 안금이는 간등 밑에 삼태사 위패를 모시고 삼 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아침저녁으로 분향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한 몸 지키려고 정신이 없는데 안금이는 태사묘 위패를 정성껏 모시며 삼 년을 산속에서 살았다. 말하자면 태사묘 위패도 피난을 한 셈이었다. 임진왜란 삼 년 동안 아무도 삼태사의 제사를 모시지 못하였는데, 안금이가 제사를 지낸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삼태사의 제사를 누가 모셨는지 걱정이 되었는데, 곧 안금이가 삼 년 동안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금이의 공덕이 지대하다. 나라에서 어떤 보상을 해 줘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보고 나라에서도 “공이 크니 벼슬을 요구하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그러나 안금이는 “나는 벼슬을 요구할 수도, 벼슬할 자격도 못 됩니다. 다만 이 어른들을 향사한 후에 제사 지낸 음식을 나한테 갖다 놓고 내 제사를 지내 주면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 후로 삼태사의 제사를 지낸 후 그 음식을 다시 내어 안금이 제사를 반드시 지내게 되었고, 지금도 안금이 축문이 따로 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삼태사의 위패를 지킨 안금이」의 주요 모티프는 ‘삼태사 위패를 지킨 안금이’와 ‘삼태사와 함께 제사를 받게 된 안금이’이다.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 위기 속에서 영웅적인 행동을 하여 마침내 큰 인물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설이다. 묘지기 안금이가 자신의 안위보다 삼태사의 위패와 제사를 중히 여긴 행동을 통해 삼태사와 나란히 신격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