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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087
한자 孫抃
영어음역 Son Byeon
이칭/별칭 습경(襲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옥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부천시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251년연표보기
본관 수주
대표관직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의]

고려 후기 부천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수주(樹州). 초명은 습경(襲卿). 처가가 왕실의 서족이고, 아들은 손세정(孫世貞)이다.

[활동사항]

손변은 과거에 급제한 뒤 천안부판관(天安府判官)으로 나아갔다가 치적이 드러나 공역서승(供驛署丞)에 특진되었다. 1226년(고종 13) 금나라의 우가하가 몽고군으로 변장하고 의주·정주(靜州) 지방에 침입해 오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서 병마부사 김희제와 함께 출전하여 압록강 넘어 석성(石城)까지 쳐들어가 적을 패몰시켰다. 이때에 읊은 칠언고시가 『동문선』에 수록되어 전한다.

그 뒤 벼슬이 누천(累遷)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는데, 누명을 입어 섬에 유배되었다가 곧 경상도안찰부사로 관직을 회복하였다. 이때 부모의 유산으로 야기된 남매간의 송사(訟事)를 지혜 있게 해결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있어 재산상속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1236년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로서 서북면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事)에 임명되고 1242년 판합문사(判閤門事)·삼사사(三司使)·동궁시독사(東宮侍讀事), 이듬해 전라도순문사를 거쳐, 1248년 추밀원사로서 몽고에 다녀왔으며, 벼슬이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업무처리에 능하여 명성이 있었음에도 처계(妻系)가 왕실의 서족이기 때문에 대성(臺省)·정조(政曹)·학사(學士)·전고(典誥) 등의 관직으로 임용될 수가 없었으나, 이에 개의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경상도안찰부사(慶尙道按察副使)로 일할 당시 남매간의 송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자 동생의 주장은 “다 같이 한 태생인데 어째서 부모의 유산을 누이 혼자서만 독차지하고 동생인 나에게는 분재하여 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누이의 답변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가산 전부를 나에게 주었으며 너의 소득은 검정 옷[緇衣] 한 벌, 검정 갓[緇冠] 하나, 미투리[繩鞋] 한 켤레, 양지(兩紙) 한 권뿐이다. 증거 서류가 구비되어 있으니 어찌할 수 있는가?”라고 하여, 서로 송사한 지 몇 해가 지났으나 미결로 남아 있었다.

이때 손변이 두 남매를 불러다가 앞에 세우고 “너희 아버지가 죽을 때에 너의 어머니는 어디 있었는가?”라고 물은즉 “어머니가 먼저 죽었다.”고 대답하였다. 손변이 계속하여 “그때 너희들의 나이는 각각 몇 살씩 되었더냐?”고 물으니 “누이는 이미 시집갔었고 동생은 아직 총각아이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손변이 듣고 나서 그 남매에게 타이르기를, “부모의 마음은 어느 자식에게나 다 같은 법이다. 어찌 장성해서 출가한 딸에게만 후하고 어미도 없는 총각아이인 아들에게는 박하게 할 리가 있는가? 생각건대 아들의 의지할 곳은 누이밖에는 없으니, 만약 재산을 나누어준다면 혹시 그 아이에 대한 누이의 사랑과 양육이 부족하지 않을까를 우려함이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해서 재산 까닭에 분쟁이 있을 경우에, 검정 옷을 입고 검정 갓을 쓰고 미투리를 신고 관가에 가서 고소하면 이것을 잘 분간하여 줄 관원이 있을 것이므로, 오직 이 네 가지 물건만 그 아이에게 남겨준 것이니, 그 의도가 대개 이러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이와 동생이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닫고 감동하여 서로 붙들고 울었다. 손변은 재산을 반분해서 남매에게 나눠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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