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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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克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태성 |
[정의]
창원시 마산 창신 학교 출신의 학자.
[개설]
이극로는 어문학자로서 일제 치하에서 민족 어문운동을 주도하여 한글 보급과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활동 사항]
이극로(李克魯)[1893~1978]는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출신으로 글을 배울 가정 형편이 못되어 어릴 적에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다가 한말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권 회복과 실력 양성을 위해 신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향을 떠나 마산의 창신 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2년 4월 고국을 떠나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2년 중국 동북 지방 내도산의 독립군 부대 훈련도감, 무송의 백산 학교와 환인현의 동창 학교에서 교육하였다. 이 망명의 여정에서 한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극로는 1922년 4월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5년간 정치학과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과 인류학을 부과로 하여 폭넓은 영역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극로는 귀국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추구하는 조선어 연구회에 가입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어문 운동의 첫 결실로서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고 1936년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는 이극로를 비롯한 최현배, 이윤재, 장지영,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만규 등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여 함흥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해방 뒤 조선어학회를 재건, 조선말 교과서 편찬, 국어 강습회 조직 등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편 조선 인류학회, 에스페란토 학회, 국술 협회 등을 조직하여 지도하기도 하였다.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에 반대하여 이극로는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남북 제(諸)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협상이 실패하자 홍명희 등과 함께 북한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극로는 1974년까지 조선 통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으로 활동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고 이극로 박사 기념 사업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