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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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山智山里八義士彰義塔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지산리 58-1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원규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83년 - 마산 지산리 팔의사 창의탑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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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마산 지산리 팔의사 창의탑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지산리 58-12 |
성격 | 기념물 |
소유자 | 창원시 |
관리자 | 창원시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지산리에 있는 창의탑.
[건립 경위]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제의 폭거에 항거하고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3·1 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산 지역에서는 3월 3일 두척산에서 김용환(金容煥) 등이 모여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발기한 이후, 3월에만 여러 차례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만세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외곽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4·3 삼진 의거이다.
4·3 삼진 의거는 3·1 운동 절정기에 폭발한 전형적인 민중적 민족 운동의 한 형태로 1919년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진동면·진북면·진전면 세 개 면의 연합 시위였다. 이 4·3 삼진 의거는 경기도 수원 지역의 장안면·우정면에서의 의거, 안성 지역의 원곡면·양성면 의거,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 의거, 경상남도 합천 의거, 평안북도 정주·선천 의거, 의주 주상면 의거, 황해도 수안 의거 등과 함께 3·1 운동 사상 대표적인 항쟁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4·3 삼진 의거는 4월 3일 전개된 제2차 의거만을 일컫는 경우도 있으나, 역사적 맥락에서는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시장에서 발발한 제1차 의거와 4월 3일에 일어난 제2차 의거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두 시위 모두 같은 지역 주민에 의한 동일한 투쟁 대상과 목표를 공유했으며, 계획 단계에서 전개까지 주동자와 가담자가 동일하여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4·3 삼진 의거는 서울에서 만세 운동이 발발한 직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 단원으로 활동하던 변상태(卞相泰)는 서울의 3·1 운동에 참가 한 후, 3월 5일 마산에 내려와 창원·함안·고성 등 인근 각지의 인사들과 접촉하여 서울의 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각자 자신의 지역에서 의거를 주도해 줄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연고지인 삼진에서 권영조(權寧祚)·백승학(白承鶴) 등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준비하고 격문(檄文)을 제작하는 등 비밀리에 의거를 준비하였다.
3월 28일 오후 1시경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가운데 마련된 단상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마산 주재 육군 중포병 대대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었으며, 이 중 6명은 6개월에서 1년형을 선고 받았고, 5명은 태형(笞刑) 또는 집행 유예 처분을 받았다.
3월 28일 시위에서 검거를 피했던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곧바로 재차 거사를 모의하여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로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9시경에는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이에 변상태는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 민족이며 자유 국민이다. 일제의 간섭을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된다.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이어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진동면으로 향하는 시위대에는 주민들이 속속 합류함으로써 그 규모가 계속 불어났다.
시위 소식을 접한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묘주(高昴住)·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22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으며, 일본 측 역시 3명이 부상을 입는 타격을 받았다.
[위치]
마산 지산리 팔의사 창의탑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산리 58-12에 위치한다.
[현황]
마산 지산리 팔의사 창의탑은 4·3 삼진 의거를 주도하다 순국한 8명 의사(義士)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1946년 지방민들에 의해 사동교 건너 암벽에 처음 창의비가 세워졌고, 1983년 10월에 지역 주민들의 발원으로 현재 위치에 탑이 건립되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은 순국한 8명의 의사를 상징하고 있으며, 탑에는 “1919년 4월 4일 김수동·변갑석·변상복·김영환·고묘주·이기봉·김호현·홍두익 등 8의사는 수천 군중의 앞에 서서 우렁찬 조국 독립 만세를 외치다 헌병의 총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이에 우리 지방민은 8의사가 쓰러진 바로 이 자리에 탑을 세워 길이 그 뜻을 남기고 알리고자 한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영령들이시여, 그날 그 때의 거룩한 뜻으로 계례의 앞날을 지키고 밝히소서.”라는 삼진 지방민들의 염원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