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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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順天 |
이칭/별칭 | 명련(命蓮), 순천댁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성 정치가.
[활동 사항]
박순천(朴順天)[1898~1983]은 부산 동래 여자 고등학교 전신인 부산진 일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馬山) 최초의 여학교인 의신 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2월 이갑성을 만나 3월에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거사가 있을 것임을 전해 듣고 마산의 만세 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였다. 3월 5일 마산 장날, 수많은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한석규 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 등의 신원 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여자 대학교 사회학부에서 수학하던 중 마산 장날의 만세 운동 참가 경력이 드러나 국내로 압송되어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40년 10월 경성 가정 여숙 부교장을 역임하였으며 8·15 해방 후 ‘건국 부녀 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 ‘독립 촉성 애국 부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대한 부인회’ 회장, ‘대한 여자 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1950년부터 제2, 3, 4대 민의원, 제6,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정치 활동 정화법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가 1963년 초 민주당 재건 위원회를 조직하여 장면, 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어 장면을 대신하여 민주당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1964년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1965년 다시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여 신민당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 회담을 감행하자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 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1972년 정계를 은퇴하고 근명 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박순천은 1940년 친일 단체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부터 ‘조선 임전 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연설 및 경성 가정 여숙의 학생들에게 근로 정신대에 나갈 것을 종용하는 등의 친일 행위가 밝혀지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이 있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리 4·19 혁명 유공자 묘역에 부군 변희용과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