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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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相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마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변상섭(卞相攝)[1891~1950]은 1919년 4월 3일의 창원 진동면(鎭東面), 진전면(鎭田面), 진북면(鎭北面)의 삼진 의거를 주도하였다.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古懸) 장날 만세 운동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잠시 은신하였던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백승학 등이 계획하고 도모하였는데, 이들은 지방 유지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2일 오후 변상섭은 변상태, 권영대와 함께 진전면 양촌리 토지 개간장에서 200여 명의 농민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정당성을 연설하며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배포하자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4월 3일 변상태는 진전면 양촌리 냇가의 둑에 2천여 명의 군중을 향해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 민족(自由民族)이며 자유국의 국민(國民)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최후의 1명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 군중을 이끌고 일본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으로 향하던 중 진북면 지산리 사동천 다리에 이를 무렵 진동면과 진북면에서 합세한 시위대 군중은 무려 7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오후 3시경 사동천 다릿목에서 마산에서 증파된 헌병 포병 대대와 대치하였다.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던 김수동 등 8명이 일본군이 쏜 총탄에 순국(殉國)하였다. 변상섭은 일제의 검속(檢束) 때 체포되어 1920년 10월 30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