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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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承仁 |
이칭/별칭 | 승학(承鶴), 경호(鏡湖)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6월 9일 - 백승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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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백승인 진동면 고현 장날 만세 운동 참가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고현 장날 만세운동 발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백승인 삼진 의거 참가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마산 삼진 의거 발발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8월 14일 - 백승인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백승인 대통령 표창 수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백승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백승인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
묘소 | 백승인 묘지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부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백승인(白承仁)[1899~1970]은 1919년 3월 28일의 창원 진동면(鎭東面) 고현(古懸) 장날 독립 만세 운동과 4월 3일의 삼진 의거(三鎭義擧)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1일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변상태(卞相泰)와 동지 권영조(權寧祚), 권태용(權泰容), 권영대(權寧大), 변상섭(卞相攝), 변상헌(卞相憲), 황태익(黃泰益) 등과 함께 4월 3일 삼진 의거를 계획하고 우선 진동 고현 장날의 거사를 도모하였다.
3월 28일 오후 1시, 백승인은 고현 장터에 모인 6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아왈동포(我曰同胞) 유진무퇴(有進無退)’라고 쓴 격문을 배포하고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으로 향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진동의 헌병 주재소는 마산의 헌병 포병 부대 및 진해 요항부(要港部) 소속 경비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이날 권영조를 비롯하여 동지 11명이 체포되었다. 변상태, 권영대 등과 잠시 은신하였다가 4월 3일의 삼진 의거를 도모하였다. 4월 3일, 음력 삼월 삼짇날 나들이를 가장한 백승인의 진북면(鎭北面) 시위대는 진동면의 시위대와 진동 장터에서 합류했다. 이날 오후 백승인은 군중 앞에 나서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만세를 외쳐 함성이 진동 마을을 뒤흔들었다. 백승인은 진전면(鎭田面)에서 오는 시위대와 합류하여 진동 헌병주재소로 향했다. 오후 2시경, 사동리 다리 앞에서 급보를 받고 출동한 진동 헌병 주재소 직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과 충돌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맨주먹으로 용감히 응전하였다. 그러나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마산의 헌병 포병대대의 야만적인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일제의 검속(檢束) 때 주동자로 체포되어 5월 20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백승인은 삼진 지역 일본인의 지방 상권(商圈) 강점에 반발하여 지방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특히 농민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동지들과 합세하여 진동 시장(鎭東市場) 내에 ‘식산 상회(植産商會)’를 설립하였다. 이 일로 그는 8개월의 구류 심문 후 방면되기도 했다.
1926년 백승인은 일제의 학정에 반발하여 경상남도지사 화전순(和田純)과 창원군수 송정(松井)에게 “혹정과 중세(重稅)에 신음하다 못해 우리 동포는 향리를 떠나 유랑하게 되니 이를 즉시 시정하라. 시정하지 않으면 너희들을 박살낼 것이다”라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냈다가 체포되었다. 1928년 4월 7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소위 협박죄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상해 임시 정부에서 파견된 이교재(李敎載)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