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64 |
---|---|
한자 | 裵齋晃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3월 19일 - 배재황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배재황 경상남도 창원 웅동면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웅동 독립 만세 운동 발발 |
몰년 시기/일시 | 1966년 10월 18일 - 배재황 사망 |
출생지 | 배재황 출생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배재황(裵齋晃)[1895~1966]은 경상남도 진해의 개통 학교와 계광 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경하여 경성 청년학교 중학과를 졸업하였다. 주시경(周時經)의 한글학교에서 국어학을 공부하였으며, 19세에 고향으로 내려와 계광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승복(僧服)으로 혹은 노동자 차림으로 위장을 하고 서울에서 등사기를 구입하여 김해를 거쳐 진해로 넘어와 이두용(李斗用)의 집에서 계광 학교 교사 주기용(朱基瑢), 허전(許詮) 등과 함께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1919년 4월 3일의 ‘웅동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웅동 만세운동 후 배재황은 조직적 투쟁을 계획하였지만 몸이 쇠약해져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1931년 봄 김해군 진영에서 일본인 박간(迫間)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소작료 인상 문제로 쟁의가 발생하자 이에 소작 쟁의 투쟁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1934년 진영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일본인 지주와의 소작 쟁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농민 조합을 설립하는 등의 농민 운동에도 힘썼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배재황은 진영에서 한글 강습소를 열었으며, 건국 준비 위원회에 참여하고 ‘미소 공동 위원회’ 경상남도 대표로 참가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좌경(左傾)으로 낙인찍혀 사회 활동을 접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