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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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鍾仁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형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시 진해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배종인(裵鍾仁)[1901~1965]은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熊東面)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계광 학교 교사 주기용(朱基瑢), 동지 정운조(鄭雲祚), 문석주(文錫柱), 김병화(金柄和)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우고 군중 동원에 총력을 다했다. 거사 당일, 이른 아침부터 마천리(馬川里) 면사무소 앞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동지들과 함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주기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배종인은 시위 군중을 이끌고 웅천(熊川)으로 향했다. 웅천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서 시위 대열에 합류하는 주민이 늘어났으니 그 인원이 무려 3,000여 명이나 되었다.
웅천 헌병 주재소(熊川憲兵駐在所) 앞에 이르자 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헌병 주재소는 진해 헌병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고 웅천 지역 거류 일본인을 동원하여 시위대와 맞섰다. 진해에서 급히 출동한 헌병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며,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체포된 배종인은 4월 4일 진해 헌병대에 송치되었다가 5월 26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4월 8일 또 다시 보안법 위반으로 진주 지청에서 3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