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69 |
---|---|
한자 | 李守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홍숙 |
[정의]
일제 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수룡(李守龍)[1911~?]은 가덕도에서 사립 소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1927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 언동과 차별 대우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속에서 민족 의식을 쌓아가던 중 김근도(金根道)가 중심이 된 재대판 가덕인 친목회(在大阪加德人親睦會)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 친목회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1934년 3월경 김근도·이수강(李壽康)·김성규(金成奎) 등이 가덕인 청년부회(加德人靑年部會)를 결성하자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재일 동포 청년을 지도 계몽하여 결속을 공고히 하고 민족 독립의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체육 활동과 상호 친목을 표방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이들은 1937년 3월부터 1938년 6월까지 수차에 걸쳐 독립 운동의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조직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여서 보다 많은 동포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로 하였다.
한편, 중일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식량 결핍 때문에 일본에 내란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소련과 손을 잡고 독립을 달성한다는 방침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이들은 1938년 7월부터 1939년 1월까지 수차에 걸친 친목 회의를 통하여 회원들에게 일제의 한국인 차별 정책을 폭로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일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2년 9월 대판 지방 법원에서 이수룡은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그 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