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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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稷山金鑛收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내수 |
[개설]
한말 광산에 대한 권리는 서양 열강들이 관심을 갖는 이권 중의 하나였다. 특히 천안의 직산 금광은 최대 금광 중의 하나로 일제의 이권 침탈의 주된 대상이었다. 일제의 직산 금광 침탈 과정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다.
[금으로 유명했던 천안]
직산은 옛날부터 금의 산지로 이름이 나있었다. 직산 금광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고려 말 1277년(충렬왕 3)이었다. 원(元)나라는 고려를 복속시키고 고려 조정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나오게 하고 고려의 왕을 원나라의 공주와 혼인시켜 부마국으로 삼은 다음 많은 공물을 거두어 갔다. 당시 고려를 산금국(産金國)이라 하여 금을 수탈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채굴해 갔다. 당시 고려 조정은 금의 공물 요구에 처음에는 가능한 범위까지 금을 채취하여 보냈다. 그러나 그 요구량이 점차 늘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고려는 본래 산금국이 아니라는 구실을 들어 금의 공물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원의 조정에서는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채광하였는데, 『직산현지』와 『연려실기술』에 직산군으로 원나라에서 채금사가 파견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원의 관리가 직산 땅에서 100여 군데나 팠으나 금을 얻지 못했다하며 이때부터 옛 직산 땅을 금굴평(金堀坪)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명나라에서 금은을 공물로 요구할 것을 두려워 1429년(세종 11)에 전국의 금은 광산을 폐쇄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금과 은을 생산할 수 없었으므로 장신구 등이 중국에서 역수입되어 고가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관원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 채광하는 이가 있었으나 이런 밀채자들을 모두 막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관원들이 상납을 받고 밀채를 묵인하거나 권세 있는 궁장(宮庄)에서 채광을 하여 효종 때에 와서는 금점(金店), 은점(銀店)이라는 관청을 두어 세금을 거두었다.
[개항과 열강의 금광 이권 침탈]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한동안 러시아 세력의 득세로 점차 대한제국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아관 파천 이후에 조선에 대한 지나친 세력 증대로 열강들의 반발을 자초하고 정부의 불신을 격화시킴에 따라 재진출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특히 철도와 광산이었다.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직전부터 한국의 철도, 전선, 광산 등의 이권을 확보하고자 대한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왔다. 그러나 이때 일본의 이권 독점의 음모는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등의 간섭으로 좌절되었고, 1896년부터 다시 한반도 재진출의 기회를 엿보면서 열강국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한편 1896년에 미국과의 운산 금광 채굴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고, 이어서 독일과 영국이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지금까지 그들이 입수한 광산 지식을 근거로 황해도 장연 금광, 은율 금광, 재형 철광을 비롯하여 경기도 안성 금광, 충청도의 직산 금광 등 5개 광산을 선정하여 1899년 12월 1일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가 외부 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때 동경의 상업인인 아사노 소이치로[淺野總一郞]을 내세워 광산 채굴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정부는 이들 광산이 이미 1898년 6월 23일에 궁내부의 소유로 결정 조치되어 궁내부 소속이기 때문에 허가할 수 없음을 일본 공사에게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직산 금광의 일본인 경영]
일본의 유력 자본가인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는 1898년 4월에 제일 은행 지점을 순시하기 위하여 조선에 왔을 때 조선 농민에 대한 구휼금 1,000원을 기증한다는 명목으로 고종을 알현하였다. 그것은 간접적으로 이권 교섭을 전개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일본 정부는 앞서 5개 광산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이를 반박하면서 재고를 요청하였다. 아울러 그중 조사 결과 가장 유망한 것으로 파악된 직산 금광을 선정하여 다시 교섭을 전개하였다.
직산에는 1899년 8월부터 안성군에서 일어 학교를 경영하던 일본인 복지진장(福祉辰藏)이 비합법적으로 채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복지진장은 직산군 이동면에 있는 영남인 덕대 최광순(崔光淳)의 광혈을 인수하고, 서울에 있는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수천 원의 자본을 끌어들여 최광순을 간무(幹務)로 삼고 일본인 용촌종삼랑(桶村宗三郞)·종강학송(鐘江鶴松)을 감독으로 하여 계속 채굴하였다. 비록 광세는 최광순의 명의로 납부되고 있었지만, 권리는 복지진장에게 있었던 것이다. 복지진장은 같은 해 10월에도 영남인 덕대 설관오(薛寬五)의 이서면에 있는 신혈을 인수하고 계속 삼동면, 보덕원까지 채굴지를 확장하였다.
삽택(澁澤)·천야(淺野) 광산 조합은 복지진장이 채굴권을 가지고 있는 직산군 보덕원광(普德院鑛)을 매수할 방침을 정하고 복지진장에게는 그 권리저당으로 일금 1,000원을 대여하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우선 소규모 개발에 착수할 금액으로 7~8만 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석정팔만차부(石井八萬次部)에게 경영을 위임하였다.
대한제국정부에서는 일본의 직산 금광 채굴권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똑같은 경로를 밟아 ‘선 채굴 강행, 후 특허권 요구’의 방식을 취하였다. 직산 금광을 둘러싸고 1900년 초부터 일본인과 대한제국정부 관리 간에 충돌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00년 1월 29일 충청남도 관찰사가 외부에 보고한 내용에 보면 일본인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불법으로 채취하고 있음을 호소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가 이미 직산 금광 채굴권을 요청한 바 있으나 어느 외국인을 막론하고 허락할 수 없으니, 일본인이 임의로 한국인의 토지를 매입하여 광산을 개설할 수 없을 뿐더러, 직산 군수의 금지령에 항의한 일본인들을 엄격히 처리할 것을 일본 공사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공사는 조사한 후에 처리하겠다는 간략한 회신만 보냈을 뿐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아 결국 직산 금광에서는 여전히 일본인들의 불법 채굴이 감행되고 있었다.
일본 공사는 1900년 3월 2일 조속히 일본인들을 직산에서 퇴거시키고 의법 조치하라는 외부 대신의 독촉을 받자 오히려 한국 측의 해당 관리를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직산 금광은 일본인 복지진장이 1899년 8월에 최광순 등의 개인 소유의 직산군 보덕원 소재 광산 채굴권을 양여 받았으며, 정부와의 규약에 의거하여 납세하고 채굴하였으니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채굴 작업에 종사하던 조선인 평안도 광부와 경상도 광부들이 지역 감정으로 충돌하여서, 경상도 광부의 고용주인 복지진장의 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과 광산 기계가 파손되고 일본인이 중상을 입은 사태를 물어 오히려 앞으로는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순사를 파견해 줄 것과 해당 지방관을 직무태만으로 처벌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 직산 군수 유병응이 직접 사태의 상황을 조사하고 보고하였고, 일본인 용촌종삼랑에게 남의 나라에서 허가도 없이 집을 짓고 채금하는 것은 장정에 위배되는 행위이니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용촌종삼랑은 일본 공관의 철거 명령이 있기 전에는 퇴거할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도주한 최광순에게 광비(鑛費)로 지급한 손해금을 대한제국정부에서 배상해 주면 즉시 철수하겠노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계속 군수는 일본인들에게 채광을 정지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오히려 그 후 직산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숫자는 증가되어 1900년 8월경에는 50여 명의 일본인이 칼과 총을 소지하고 관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 채광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불법 채금 강행이 난관에 부딪치자 일본은 다시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직산 금광 채굴의 특허를 강청하였다.
이후 일본인과 대한제국정부 사이에는 외국인 채광 조약과의 문제, 이익 균점의 시비 문제, 경인·경부간의 철도 이권 문제 등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의 광산 이권의 요구가 난관에 부딪치자 일본 공사 임권조는 본국 정부에 의뢰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 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끈질긴 교섭의 결과로 일본 공사가 1900년 7월에 고종 황제로부터 직산 금광 특허 응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8월 16일 궁내부 대신 서리 윤정구(尹定求)와 일본의 삽택영일·천야총일랑 광산 조합의 대리인 좌좌목청마(佐佐木淸麿)와의 사이에 ‘직산 금광 채굴 합동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일본인의 불법 침탈이 결국은 합법화되고 말았다.
일본이 직산 금광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청일 전쟁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즉 청일 전쟁 당시 직산은 일본군의 주둔 지역으로 더욱 그 일대의 사금지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직산은 옆으로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여 교통상으로 편리한 이점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직산군 일원은 안성, 둔포, 천안, 목천 등 사방에 걸쳐 장래성이 유망한 금광이 산재되어 있다.
1895년 『한성 신보』 기사에도 직산에서 사사로이 채금하는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하니 금광 위원을 파견하여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세를 징수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1896년 4월에는 농상공부에서 금광 특파원이 파견되고 있었다. 그 후 1898년 6월에는 43개의 유망 광산의 하나로서 궁내부에 이속되어 내장원 관장하에 계속 채광되었다. 그리하여 다수의 평안도 및 경상도 출신 광부를 포함한 수천 명이 금광 채굴에 종사하고 있었다.
직산 금광 주요 금광은 무재산 금광, 복통가 금광, 주청가 사금광, 삼가 사금장을 들 수 있다. 특히 일본인이 지정하여 특허를 얻은 구역은 무재산과 복통가 사이의 보덕원이라고 불리는 금광으로 운산 금광, 은산 금광과 더불어 전국 금광 중에서 매우 광질이 우수하다는 평판이 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약을 체결하자 사무장에 고전양삼(古田良三), 기술장에는 공학사 전천익이(前川益以)를 초빙하여 면밀한 조사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보덕원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석금광 채굴에 주력하였으며, 근대식 설비를 갖추고 채광 작업을 허가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삼곡리 사금장은 채금 성적이 가장 우수한 곳으로서 일본인들은 새로운 채금 방법을 동원하여 채광 작업을 하였다.
직산 금광에 종사하던 광부의 수는 광산의 성쇠에 따라 다소 증감이 있었지만 대체로 2,000명 이상이었다. 그중 1/3은 평안도에서 내려온 광부들이었다. 산금고(産金高)는 대체로 1년 평균 약 70관[262.5㎏] 내지 80관[300㎏]으로 그 가치는 30만 원 이상에 달하여 충청도 전부의 산금고 중에서 1/2 이상을 점하였다.
한편 일본 사람들은 직산 금광을 경영하면서 그 일대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우선 계약문 1조에 의거하여 2개년은 다른 열강과 맺은 광약보다 1년이나 늘려 잡았다. 그들의 저의는 선정 기한을 오래 끌어 그들의 채광 활동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즉 시굴 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직산군 내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산천, 농토까지를 마음대로 침범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이 기대하였던 만큼 산금 성적이 양호하지 않자 광구 선정 기한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오히려 직산 군수가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여 광무를 진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광처를 택정해 줄 것도 신청하였다. 물론 광구 선정을 하기까지는 채금 수입이 있어도 대한제국정부에 납세의 의무는 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이 직산 금광에서 자행한 여러 가지 간책 중 가장 비열한 것은 광구 선정의 지연 술책이었다. 즉 일본은 1902년 12월 광구 선정 기한이 이미 지났는데도[1902년 8월까지] 선뜻 광구를 결정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오히려 외부에 납세를 독촉하는 직산 군수를 비난하는 호소문을 보내고 군수의 횡포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개공 기일의 연기를 요청하였다. 실질적으로는 채금 작업을 하면서도 납세금을 기피하기 위해 또 한정된 지역보다는 더 넓은 구역에서 자유로이 채굴을 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5년 5월에는 직산군 이동면 신전리의 주민 김만수의 전토를 무단 채굴하는 비행을 저질렀다. 이때 외부 대신 이하영(李夏榮)은 일본 대리 공사 하기와라 모리카즈[萩原守一]에게 일본 광산회사 토지 매입의 무효를 통고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전주(田主)도 모르게 일부 악덕 관리와 결탁하여 강제로 토지를 매입한 것이다. 그들은 전토 매매 증서까지 제시하면서 한화 55원을 지불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채굴한 것이라고 강변하였지만, 사실은 전주의 가족을 위협하여 강제로 탈취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직산 금광 채굴권을 특허 받은 삽택·천야 광산 조합은 1905년 4월 이시이 큐조[石井久三] 등에게 대리 경영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시부사와 에이치·아사노 소이치로 등은 함흥, 갑산 채굴권을 요구하였다. 이시이는 1906년 광업법이 발포된 뒤 미국인 데슐러의 자본을 끌어들여 미·일 합자회사인 직산 광업 회사를 설립하여 채굴 작업을 더욱 활발히 진행할 수 있었다.
[직산의 노다지]
직산은 차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석금이 상당한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직산현과 천안시 일원의 들판에도 사금층이 고루 펼쳐져 있었다. 일본인들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 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러일 전쟁, 을사보호조약 등 여러 사건을 일으키며 정치와 경제의 양면에서 대한제국정부를 압박하였다.
또한 일제는 우리나라의 풍부한 금 매장을 그대로 넘기지 않고 금광 수탈을 진행하였다. 특히 직산의 금광에 눈독을 들여 왔다. 그래서 1900년 민간인을 내세워 직산 금광 채굴권을 얻기 위해서, 대한제국 궁내부 대신 윤정구(尹定求)와 일본 민간인 시부사와 에이치와 아사노 소이치로 사이에 ‘직산군 금광 합동 조약’을 맺어 일본인이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직산군 동서 60한리(韓里) 남북 40한리를 광구로 정하고 그 안에 일체의 광물을 채굴할 수 있으며, 기득권을 가진 다른 광권은 2년간 조업한 후 일본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광업에서 얻어지는 생산품은 모든 비용을 제외하고 순 이윤 중 25%를 대한제국정부의 궁내부에 상납한다는 조건이다. 기한은 25년이며, 천재지변 기타 변고로 조업이 중지된 기간은 신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개인 광산 조합과 대한제국정부가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한 점과 상납금이 너무 적은 불평등 조약이라는 점 등의 문제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감독관은 파견하되 내부 경영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조약은 10년 후 경술국치로 25% 상납 조항조차 무산되고 일본의 조선 총독부는 광구 설정 허가를 갱신하여 조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직산 지역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 조선 중앙 광업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일제는 한국 강제 병합 이후 채굴권을 미국인에게 양도하였다. 조선 중앙 광업소는 직산 광산에서 막대한 양의 광석을 채굴하였다. 직산 광산의 채굴량은 충청도 채굴량의 1/2에 달할 정도였다. 조선 중앙 광업소는 평안남도 운산 광산 다음 가는 광업소였다.
광부는 500가구에 인구 3,000명이나 되었으며, 일본 헌병 주재소가 있어 광산을 보호하였다. 경술국치 후 일본 정부는 한국 병탄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인에게 광업권을 주었다. 그리하여 미국인은 양대리 석광을 개발하였으며, 일본인은 양대리 광산을 양도하고 광업소를 옮겼다.
미국인 광업 회사는 엄청난 금을 캤으며 금이 들어 있는 광석에 한국인 인부는 손을 대지 말라는 ‘노 탓치(No Touch)’라는 말이 ‘노다지’라는 단어로 변하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 후 일본인들이 산금 회사를 설립하여 금을 채굴하였는데, 그 수많은 금광 회사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다. 또한 당시 금광에 종사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사망하였기 때문에 증언을 듣기도 어렵다. 확인되는 산금 회사 기록 중에서 일본에 본사를 두고 성환에 출장소를 둔 일본 산금 흥업 주식회사(日本産金興業株式會社)가 있었다. 이 회사는 충주, 김제, 공주, 강원도 등지에 출장소를 두고 채광에 열을 올렸다.
[일제의 직산 금광 침탈]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본의 광업 회사들은 제약 없이 앞을 다투어 한국에 진출하여 금 채취의 독무대 기반을 굳혀 갔다. 구한말에 들어온 시부사와 에이치가 영국 자본과 합작으로 직산 사금을 채금하였다.
직산군뿐만 아니라 천안시 일원에도 사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청수동 수도산에 광산이 개발되어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광석을 나르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가동되었던 것을 지역의 나이 많은 노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 금 탄광 회사의 명칭이 전하지 않으나, 당시 전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채광 설비는 탄광처럼 갱에 보조목을 받쳐가며 레일을 깔고 밀차로 돌과 흙을 실어 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 광산은 당시로는 최신 장비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갱 밖의 잡역을 빼고는 한국인을 인부로 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렴한 노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비싼 장비를 사용한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산금량이 너무 엄청나서 외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여 취해진 조치라는 풍문이 돌았다. 당시 떠도는 얘기로 하루에 평균 금 3근[11.25㎏]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성환 광업 주식회사에서는 석광뿐 아니라 풍부하게 매장된 사금에 주목하여 최신 장비를 도입하여 채굴하였다. 그 장비가 배 모양으로 생겨서 금배라고 불렀다. 직산 지역은 금이 매장되지 않은 들이 없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파내려갔다. 금배는 길이 32m, 폭 12.6m, 높이 26m로 지하로 팔 수 있는 능력은 10m나 되는 거대한 선체로 물이 고인 하천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장비였다. 금배는 광복 전까지 가동되다가 광복 후 해체되었는데, 1대는 직산면 상덕리에 있었으며, 1대는 안궁리에 있었다. 또한 현재의 천안시 용곡동 앞들에서도 한 대가 가동되었다.
성환 광업 주식회사는 8·15 광복 후 일본인은 물러가고 한국인 사원들이 인수하여 몇 년간 운영하다가 폐광하였다. 회사를 인수한 한국인 사원들은 직산면 산정리 함덕란(咸德蘭)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는데, 함덕란은 본래 덕망이 있는 사람이라 아무런 잡음 없이 회사를 정돈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선 사업을 많이 해서 칭송을 받았다.
또한 성거읍에 천흥 광산(天興鑛山)이 있었다. 입장의 중앙 광산(中央鑛山)도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산으로 8·15 해방 후 우리나라 광업인에 의해 계속 채굴되었는데, 중앙 광산에서만 연간 7.9㎏을 생산하였다. 또한 1980년에 등록한 천보고아산 회사가 입장과 성거의 두 광구에서 연 산금량 33.6㎏의 실적을 올렸다 하니 일제가 채굴해 간 금이 어느 정도의 수량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사금채취와 생활상]
매장량이 많은 큰 광산은 일본인이 모두 점유했지만, 작은 사금광은 한국인이 채굴하는 곳도 많았다. 명칭은 직산 사금이라 하나 구직산군 4개 읍면과 현 천안시 일원이 모두 사금 지대였다. 그래서 입장면 구석에서부터 직산면, 성환읍, 성거읍, 천안시 일원의 들판은 파헤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중 직산면 시름세들이 가장 산금량이 많았다. 이 근처 들녘은 철도 부설지를 빼고는 한곳도 파헤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시름세 사금광에서 한국인으로 성공한 이는 김봉서(金鳳瑞)였다. 김봉서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나 학업을 닦지는 못하였으나 인물이 호탕하여 큰일을 해낸 인물이다. 젊어서는 금광의 막노동 인부로 일하다가 덕대, 연상으로 발전하여 이 지역의 금광왕이 되었다. 그는 사금으로 돈을 벌자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줘서 현재 부대동 1호 국도변에 김봉서 시혜 기념비(施惠記念碑)가 서 있다.
사금을 파내는 과정은 먼저 표토층을 파내면 검은 흙이 나오고 검은 흙이 나온 뒤 사질토가 나오는데, 이 토층에 사금의 입자가 함유되어 있는 사질층을 ‘감’이라 한다. 나무판으로 짠 문내리개를 걸쳐 놓은 후 ‘감’을 나무판에 물로 일어 내린다. 그러면 모래흙은 밑으로 내려간다. 금의 입자가 많이 함유된 모래를 따로 모아 수은으로 금 입자만 골라낸다. 금의 입자를 고르고 난 사토는 ‘버럭’이라 하였다. 성환에서 천안에 이르는 들판에는 버럭 더미와 웅덩이가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나중에는 논으로 환원되었다. 이렇게 금광이 한참 성황일 때 천안 지역에는 많은 색다른 직업, 색다른 풍경이 전개되었다.
색다른 모습으로 ‘거랑꾼’이라는 노동자가 있었다. 아무리 금을 잘 일어낸다 해도 버럭 더미 속에는 금의 입자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거랑꾼은 광산의 채광 인부가 아닌, 금을 일고 버려둔 버럭 더미를 다시 나무 함지로 일어 금을 채취하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운이 좋으면 품값의 몇 배가 나오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거랑에 재미를 붙인 사람은 날품팔이를 하지 못하였다. 금을 이는 인부들이 거랑꾼의 몫이라 하여 대충 금을 일고 버럭을 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밤에 아직 일지 않은 ‘감’ 더미를 파오다가 매를 맞는 광경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금을 금은방이나 은행에서 거래하지만 당시는 금이 흔하였기 때문에 금을 사는 노점이 있었다. 지금의 사직동 시장 입구의 길가에 자리를 펴고 작은 책상과 금 저울을 놓고 앉아서 거랑꾼이 가져오는 금을 거래하였는데, 일종의 소량 금 수집상이었던 것이다. 거랑꾼이 창호지에 싼 금가루를 꺼내 놓으면 금 노점상은 숫돌 모양의 거문판에 문질러 보아 금의 품질을 판정하고 돈으로 계산하였다. 또 하나, 가장 산금량이 많은 입장 장터는 술집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금 밀수꾼도 있었는데, 당시 금을 가지고 만주를 가면 몇 배의 돈을 받기 때문에 금을 밀수출을 하는 이가 많았다. 그렇지만 금 밀수는 몸을 내던지고 하는 일이어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는 경부선, 경의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갈 수 있었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의 감시와 수색이 심해서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장사였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성황을 이루었던 금광이 광복 후 점차 쇠퇴하여 현재는 산금이 막혀 버렸다. 일제가 철저하게 우리나라 금맥을 샅샅이 뒤져 금을 캐간 것이다. 또한 금광이 번성했던 당시는 금 제련소가 곳곳에 있었는데, 직산 광산은 물론 천안 안서동 중암 부락에 금 제련소가 있었다. 제련소에서 제련하는 금은 대체로 석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