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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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居姓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오는 성씨.
[성씨의 개념]
성씨란 시조(始祖) 이래로 대를 이어 내려오는 혈족의 공통 칭호이다. 사실 성(姓)과 씨(氏)는 본원적인 의미에서는 개념이 달랐다. 성은 혈통의 연원을 표시하는 것이고 씨는 성의 분파(分派), 곧 본관을 의미하였지만, 보통은 구별해서 쓰지 않고 안동 김씨(安東金氏), 연안 이씨(延安李氏) 등 본관과 성을 합하여 씨족을 표시하는 한 개의 숙어로 쓰였다.
전통적으로 혈연 의식이 강했던 우리나라에서 성씨는 이름과 더불어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씨 자체보다는 본관을 포함하는 성관(姓貫)이 혈연적·사회적으로 더 의미가 있었다. 개인의 능력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가문과 문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던 조선 시대에 양반 가문 내지 명문거족을 지칭하는 일차적인 기준이 성관이 될 정도로, 성관은 사회 신분을 가늠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중국의 성씨 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 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성은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성과 결합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구별하는 구실을 하였다. 성은 태어난 부계 혈통의 표지(標識)이기 때문에,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고 하여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 동안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습법이다.
현행 민법상으로 자(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되어 있으며[민법 제781조], 2005년 민법 개정에 의해 성의 변경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도록 하였다. 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옛 민법으로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성에 따라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 각기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는 표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씨’이다. 씨는 분화된 혈통[성]에서 각각의 지연(地緣)을 표시하는 표지이므로 원래 의미는 성의 분파를 뜻한다. 그래서 씨는 같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 구분한 것이므로 본관에 해당된다. 경주 김씨(慶州金氏)·전주 이씨(全州李氏)·밀양 박씨(密陽朴氏) 등에 붙는 ‘씨’ 자에는 존칭적 의미도 잠재해 있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변천]
1. 우리나라 성씨제의 성립
우리나라의 성씨는 고대 중국의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족을 중심으로 다른 씨족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호칭이 성으로 나타난 것인데, 처음에는 왕실이나 귀족, 고급 관료층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개국과 국가 변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나 귀화인(歸化人)에게 거주지 등의 명칭을 붙여 성씨를 하사하면서 급속히 확대되었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계기는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 고려 개국 과정에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한 호족 세력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함에 따라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살던 지역 명에서 연유한 군호(君號)와 식읍(食邑)을 내리고 성씨를 하사한 사례가 많았다. 후손들은 대를 이어 살면서 지역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거 성씨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일반 서민까지 성씨가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로 과거의 영향으로 관료 제도가 보편화된 이후에야 가능했다. 노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의 노비 제도 폐지와 1908년 호적법 제정 이후에 가능했다.
2. 『세종실록지리지』의 각읍 성씨
조선 시기에 천안 지역의 토착 세력 및 이거 세력 등을 살필 근거의 하나이자 성씨를 수록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각 읍 성씨 항목이다. 여기에는 토성(土姓)·내성(來姓)·속성(續姓)·차성(次姓)·망성(亡姓)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에서 토성이란 고려 초 지방 행정 구역의 재편성 때부터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될 때까지 그 지방의 토착인으로서 그 지방을 성의 기원인 본관으로 삼은 유력한 성씨 집단을 말한다. 이러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대개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박은 토착 세력들로서 점차 중앙 귀족으로 성장하거나 향리 계급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토성은 주로 향리들의 성씨라고 할 수 있다.
내성이란 본래 성씨를 가지고 있다가 어떤 사유로 다른 지방으로 이주했거나 세력근거지를 변경한 성씨, 그리고 그 지방에 새로운 본관을 삼은 성씨로서 같은 지역 내에 이미 같은 성씨가 있을 때 이를 구별하려는 것을 말한다.
속성이란 고려 초에는 토성으로 확정되었지만, 조선 초에 행정 구역 등이 재편성되거나 새로이 행정 구역이 신설되는 등의 사정으로 종래의 본관 또는 성씨조차 바뀌게 된 성씨들을 말한다.
차성이란 토성이 성립된 이후 새로이 형성된 신흥 세력들에게 부여된 성씨들이다. 토성과 함께 그 지방을 같은 본관으로 사용하는 같은 성씨이지만 토성에는 견줄 수 없는 우열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토성과 차성의 구별이 희미해졌다.
망성이란 종래에는 토성이었지만 모반이나 각종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신분이 격하되었거나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등의 사유로 지역에서 사라진 성씨를 말한다.
이 중에서 소멸된 망성이나 이주해 온 내성 및 속성과 달리 토성은 군현의 성립 이래 각 지방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세력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토성은 지역적 의미의 ‘토(土)’와 주민적(住民的) 요소의 ‘성(姓)’이 결합된 것으로서 망성이나 속성·내성·사성 등과는 구별되었다. 특정 지방에 토착하고 그 지명을 본관으로 했다고 해서 토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구획 초부터 토착하며 군현 성립에 참가했기 때문에 토성인 것이다.
한편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각 도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토성만 별도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GC04500027_01_『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도별 토성
위 표에서 보듯이 토성이 가장 많은 곳은 전라도 지역이고 그다음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순인데, 이들 세 지역의 토성이 1,288개로 전국 토성의 75%를 차지한다. 이로 보아 조선 시대에 삼남을 중시한 이유가 물산 못지않게 인적 자원이 풍부했던 데에서 비롯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충청 지역의 비중 역시 만만치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안 지역의 성씨]
1.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부터 조선 후기의 『충청도 읍지(忠淸道邑誌)』까지 각 지리지에 수록된 천안의 성씨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GC04500027_02_지리지 수록 성씨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인 15세기에는 천안군과 목천현, 직산현과 죽산현 등의 세거 성씨를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서 천안군의 토성은 다섯이고 망성은 하나, 내성은 둘이다. 그리고 덕흥의 망성은 하나, 모산의 망성은 넷이고 신종과 돈의도 하나씩이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인 15세기에, 천안군은 전(全)·하(河)·신(申)·심(沈)·장(張) 등 다섯 개 성씨가, 직산현은 최(崔)·유(兪)·백(白)·조(趙)와 촌성(村姓)인 전(全) 등 5개 성씨, 목천현은 우(牛)·마(馬)·상(象)·돈(豚)·장(場)·신(申) 등 6개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15세기 이전까지 이들 성씨가 천안 지역에 뿌리를 내렸으며,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던 세거 성씨[토착 세력]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안군의 성씨로 신(申)·장(張)·전(全)·하(河)·심(沈)·노(盧)의 여섯을 비롯하여 목천현의 성씨로 우(牛)·마(馬)·상(象)·돈(豚)·장(場)·심(沈)·신(申)·왕(王)의 일곱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15세기 중엽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16세기 중엽이 되면서 천안군은 전(全)·하(河)·신(申)·심(沈)·장(張)씨의 순서가 신(申)·장(張)·전(全)·하(河)·심(沈)·노(盧)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망성이었던 노씨가 본군의 성으로 편입되면서, 재지 사족(在地士族)[지역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지배 계층]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씨와 장씨가 전씨와 하씨의 앞에 기록된 것은 이 시기에 이들 집안에서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었거나 활동이 왕성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목천현에서는 15세기와 16세기에 세거 성씨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직산현의 경우는 전씨(全氏)가 새롭게 본현의 성씨로 기록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17세기 중엽에 편찬된 『동국 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성씨 기록이 없어 변화를 살피기 어렵다.
2. 조선 후기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6세기 중엽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천안군은 전(全)·전(田)·신(申)·장(張)·하(河)·심(沈)·노(盧)의 순서로 세거 성씨를 기록하여 전씨(全氏)와 전씨(田氏)의 지역 내 세력화가 어느 정도 활발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직산현에서도 전씨(田氏)가 새롭게 세력화를 이루었으나 목천현에서는 변화가 없다. 19세기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에서는 『여지도서』에 없는 경(敬)·왕(王)·맹(孟)의 등장이 새로울 뿐이고 그다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읍지에 나오는 성씨 기록도 별다른 변화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진행되고, 지역별로 많은 성관이 등장하였음에도, 천안 지역은 18세기 중반까지도 16세기 중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천안 지역은 성씨 변화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중엽 이후까지 세거 성씨의 변화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천안 지역으로 새로운 성관의 입향과 명문가의 낙향 등이 활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토착 성씨의 세력화와 이들의 향촌 사회 주도권이 상당히 강했음을 반증한다. 이와 더불어 지역의 개방화도 역동적이었다고 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3. 성씨와 급제자
성씨의 분석과 더불어, 천안의 향촌 사회를 주도하였던 세력의 일단을 살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소과(小科) 합격자에 대한 분석이다. 이는 조선 시기에 천안의 재지 사족으로서 향촌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아 영향력을 끼친 가문과 그들의 성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사마 방목(司馬榜目)』을 보면, 천안을 거주지로 한 입격자는 모두 109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중 중복된 인사와 『영성지(寧城誌)』가 편찬되었던 1852년 이후의 출생자를 제외하면 89명이다. 1명을 배출한 연안 이씨부터 10명을 배출한 풍산 홍씨(豊山洪氏)까지 38개 성관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는 각 지리지의 성씨 항목에서 보았듯이, 천안의 재지 사족 세력이 다양하게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 중 하나이다.
이 중에는 10명을 배출한 풍산 홍씨부터 성주 현씨(星州玄氏) 8명, 전주 이씨 5명, 남양 서씨(南陽徐氏) 5명, 창원 유씨(昌原兪氏) 5명, 안동 김씨 5명 등 총 38명, 43%를 차지하는 6개 성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3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을 정리하면 14개 가문으로 총 63명이며 71%에 해당한다. 이는 조선 후기 천안 지역 지배층의 혈연 구조의 단면과 향촌 사회 주도층이 몇몇 성관에 편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3명 이상을 배출한 가문만을 별도로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GC04500027_03_3명 이상의 소과 합격자를 낸 가문
이 표는 14개 가문에서 89명의 입격자 중 63명을 배출하여 입격자가 특정 가문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입격자의 분포가 다양하여 소수 성관도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들 89명 중 50명[56%]이 군지의 인물 및 성씨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군지 편찬 당시까지 상당히 컸음과 혈연적·지연적 요소를 바탕으로 여러 대에 걸쳐 재지 사족으로서 향촌 사회를 주도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천안의 향촌 사회 주도권은 이들 성씨가 서로 역학 관계를 형성하면서 조제보합(調劑保合)[충돌을 조정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고 합치점을 찾게 한다는 뜻]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천안군의 자료로 목천현과 직산현의 자료가 빠져 있기 때문에 현재의 천안이라기보다는 옛 천안군의 상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