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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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蒙古-侵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철영 |
발단 시기/일시 | 1231년 - 몽고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을 계기로 몽고의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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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231년 - 몽고의 1차 침입 |
종결 시기/일시 | 1259년 - 몽고군과 강화를 맺음 |
성격 | 몽고 침입 사건 |
[정의]
1231년(고종 18)에 몽고가 사신 저고여(著古與) 살해 사건을 구실로 침입한 후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사건.
[개설]
1225년에 고려에 와서 무례한 행동을 하던 몽고 사신 저고여 일행이 귀국 도중 압록강 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고는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1231년(고종 18) 살례탑 부대를 보내 고려를 침략했으나, 귀주성(龜州城)에서 박서(朴犀) 부대의 항전 등 고려 군민의 저항을 받아 1232년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이후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9년 동안 6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에 대한 몽고의 무리한 요구가 계속되자 최이(崔怡)는 1232년(고종 19) 6월 장기적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해전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계산한 조치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내성과 외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궁실(宮室), 태묘(太廟), 사직(社稷), 저택, 사찰을 세워 개경을 옮겨 놓은 듯했다. 연등, 팔관 등의 행사도 전처럼 호사스럽게 치렀다.
몽고는 고려의 강경한 자세에 자극되어 1259년(고종 46) 강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29년 동안 6차례나 침입해 들어왔다.
[경과]
충청남도 천안의 경우 성종 때에 환주도단련사(歡州都團鍊使)로 개칭하였고, 목종(穆宗) 때에 폐지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다시 천안이라 일컫고 지부사(知府事)를 삼았으며, 고종 43년에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선장도(仙藏島)로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영주(寧州)로 개칭하였고, 공민왕 때에 다시 천안부로 하였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종 13년에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쳤다가 1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231년 8월부터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하였고, 1259년까지 6차례나 침입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했고, 몽고군은 고려 왕을 강화에서 끌어내기 위해 군대를 끌고 내려왔다. 또한 고려가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불경에 의지한다는 것을 알고 불경이 새겨진 목판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후 몽고군은 강화도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였고, 농민들까지 나서 싸우면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 강화도를 앞두고 몽고군이 처인성(處仁城)[지금의 용인] 앞에서 쉬고 있을 때, 지휘관인 승병 김인후가 계략을 짜서 몽고군의 적장 살리타를 꾀어 내 살해했다. 또한 휴식을 취하던 몽고군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몽고군은 다시 고려로 쳐들어 왔고, 별다른 수가 없던 고려 조정에서는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어려운 일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에 지쳐 결국 고종(高宗)은 항복하고 말았다.
[결과]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버텼다. 바다를 통해 조세를 거둬들일 수 있었고, 김윤후(金允侯) 등의 애국적 부대들이 처인성과 충주성 등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한 것이 고려 왕조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내륙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커서 조정 내부에서는 몽고와 강화를 맺으려는 온건파가 득세하여 마침내 1258년(고종 45)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이 일어나 김인준(金仁俊)이 최의를 타도했다.
다음 해인 1259년 3월에 고려는 태자의 몽고 방문을 허락하는 강화를 맺고 몽고를 물러가게 하였으며, 이어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1270년에 최씨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인준·임연·임유무 등의 무신들도 차례로 제거됨으로써 100년간에 걸친 무신 정권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는 29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자주성을 크게 침해당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몽고풍의 영향을 받아 고려의 풍속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또한 약 30년 동안 계속 된 전쟁으로 국토는 거의 황폐해지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하지만 각지의 농민과 천민들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저항하였고, 대몽 항쟁의 진정한 주체는 최씨 정권이 아니라 민중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