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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94
한자 稷山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문철영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 지역에 설치된 고려 및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직산현 조에 보면 직산현은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12.96㎞]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8.247㎞]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9.818㎞]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3.927㎞]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8.247㎞]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8.64㎞]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89리[74.225㎞]이다.”라고 지리적 위치를 표시하였다.

또 그 연혁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내용]

조선시대 지리지의 자료에 의하면 직산현은 진천과 안성, 천안, 목천, 평택과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189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백제 때 위례성이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점령하면서 사산현을 설치했고, 남북국 시대에도 이름이 같았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서 직산현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처음에 천안부 속현이었다가 뒤에 감무를 설치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군으로 승격했다가 다시 태종직산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직산현 성거산위례성이 있으며, 세조가 현의 동북쪽에 온조왕의 묘를 세우고 봄 가을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서거정(徐居正)은 영남(嶺南)으로 출장을 가다가 직산에 들러 「제원루(濟源樓)」라는 시를 남겼는데, 시의 서문에서 서거정은 이 누각 이름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뜻이라며,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라고 쓰고 있다.

[변천]

직산현은 1505년(연산군 1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예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안군으로 병합되었다.

이용자 의견
임** 지금의 팽성읍 도두리, 신대리, 노양리가 옛 날에는 직산현에 속해 있었다는데, 언제부터 팽성읍에 속했는지 알고 싶읍니다.
  • 답변
  • 디지털천안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지역의 향토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소개하는 곳입니다. 지역에 관한 유래는 지자체 홈페이지나 인터넷 검색[http://cafe.naver.com/pgsmo/9830]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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