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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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白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81년 - 이시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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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60년 - 이시백 사망 |
현 소재지 | 이시백 신도비 -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이시백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시백의 신도비.
[개설]
이시백(李時白)[1581~1660]은 연평부원군 이귀(李貴)[1557~1633]의 장남으로 1623년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또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웠다. 훗날 연양부원군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시백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도 인조를 대피시키는 등의 공으로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1650년(효종 1) 김자점(金自點)의 역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도성 밖에서 평생을 보내었다.
[건립 경위]
조선 시대에는 정 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이시백 역시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인물로 신도비가 세워질 수 있었다.
이시백이 사망하자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에 장사를 지내고, 묘역의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를 계기로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며 천안시 광덕면과 풍세면 일대에 세거지를 넓혀 갔다. 천안 지역과의 인연은 아버지 연평부원군 이귀가 공주 일대에 사패지를 받으면서 이를 기반으로 묘역을 조성하게 된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이시백의 묘를 매당리에 두게 된 정확한 사유는 문헌에서 찾기 어려우나 이곳 역시 사패지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위치]
이시백 신도비(李時白 神道碑)는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에 있다. 광덕면사무소에서 풍세천을 건너 400m 떨어진 매당 교차로에서 자무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 길을 따라 400m 들어가면 자무실 마을 회관의 뒤쪽으로 이시백 신도비가 보인다. 또한 마을 안쪽의 안자매로 들어가는 길목에 남동향으로 튀어나온 낮은 산줄기 아래에 이시백의 부부 묘가 있다.
[형태]
방형의 화강석 대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형의 이수[비석의 머리 등에 새긴 용의 모양]를 올렸다. 새로 세운 신도비는 규모가 더 크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석(龜趺石)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으며 주위에는 낮은 보호 시설을 구비해 두었다.
[금석문]
비의 상단에 전서로 ‘연양부원군 이공 신도비명 병서(延陽府院君李公神道碑銘幷序)’이라 쓰여 있고,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이시백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0에 수록되어 있다.
[현황]
주변에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묘역과 함께 신도비에 대한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인조반정의 공신 연양부원군 이시백의 삶을 기리는 금석문 문화재이다. 비석 자체는 미술사적으로 뛰어나지 않으나, 비문을 통해 이시백의 활약과 가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연안 이씨가 천안에 입향하는 과정과 사족 활동을 알려 주며, 인조반정을 이끈 서인 정권의 실세였던 연안 이씨 가문의 변천사를 알려 주는 역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