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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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박재용 |
[정의]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서 횃불과 연기로써 알리는 조선 시대 신호 체계.
[개설]
선사 이래 문명의 발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불이다. 인류는 다양한 용도로 불을 사용하였고, 한층 더 진화하여 신호 체계로까지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봉수(烽燧)이다. 우리나라에서 불을 신호 체계로 이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 시대로 추정되지만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확립된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 시대라 할 수 있다.
봉수제의 시원은 중국의 경우 이미 주대(周代) 이전부터 시작하여 전한대(前漢代)에 걸쳐 봉수가 있었고, 점차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에 이르러 성립되었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정비 확립되었다. 이는 유구의 흔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봉수는 대부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조선 시대 봉수의 거화법(擧火法)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써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봉수는 전국 400여 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봉수는 1895년(고종 32) 봉수가 폐지된 이후 사용되지 않아 방치된 것들로 잔존 상태가 불량한 편이다.
한편 봉수는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크게 경봉수(京烽遂), 내지 봉수(內地烽燧), 연변 봉수((沿邊烽燧)로 나눈다. 이외에도 조선 시대에는 연변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중요시하였던 진영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본읍(本邑)으로만 연락하도록 운영되었던 권설 봉수(權設烽燧)가 있다.
[천안의 봉수]
천안 지역의 봉수는 현재 대학산[태학산] 봉수와 광덕 봉수[쌍령산 봉수]가 있다. 먼저 대학산 봉수는 『세종실록』에 대학산(大鶴山)과 대학사라는 산명과 사찰 명칭이 전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군 불우 조(佛宇條)에도 대학사라는 사찰이 존재하고 있고, 대학산 정상부에 봉수 터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대학산 봉수는 조선 전기 또는 그 이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대학산 봉수는 공주 쌍령산 봉수대에서 아산의 연암산 봉수대를 연결하던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조사되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광덕 봉수는 공주시 쪽에서는 ‘쌍령산 봉수’라고도 부르는데, 봉수가 있는 쌍령산 정상부가 천안 광덕면 원덕리와 공주 정안면 인풍리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광덕 봉수는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남쪽에 위치한 공주의 고등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천안의 대학산 봉수로 전달하던 곳이다.
현재는 봉수대를 둘러싸고 있었던 담벽 중 서남쪽과 북쪽 일부가 잘 남아 있는 반면 동남쪽은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동남쪽에 진입로가 있어 더욱 훼손이 심한 것으로 판단된다. 석축 시설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바닥에 지름 1m 이내로 잔자갈이 평평하게 깔려 있으며, 그 주변에 지름 230~260㎝ 정도의 원형으로 자연 석재들이 산재해 있어 연대(煙臺)를 세웠던 자리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