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19 |
---|---|
한자 | 木川鄕校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12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건립 시기/일시 | 1413년 - 목천향교 건립[추정] |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7년 - 명륜당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56년 - 문묘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2년 - 목천향교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12월 23일 - 목천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0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목천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목천향교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교촌리 129 |
원소재지 | 목천향교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교촌리 1구 솟대배기 |
성격 | 향교 |
정면 칸수 | 3칸[대성전]|3칸[동무]|3칸[서무]|5칸[명륜당]|4칸[동재]|3칸[내삼문] |
측면 칸수 | 3칸[대성전]|2칸[동무]|2칸[서무]|4칸[명륜당]|1칸[동재]|1칸[내삼문] |
소유자 | 향교 재단 |
관리자 | 목천향교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교촌리에 있는 조선 시대 향교.
[개설]
목천향교(木川鄕校)는 조선 시대에 충청도 목천현 지역의 지방 교육을 담당한 국립 교육 기관이다. 창건된 시기는 목천현에 현감이 파견되었던 1413년(태종 13) 이후로 추정된다. 목천현의 읍지인 『대록지(大麓誌)』에 의하면 향교는 원래 관아로부터 서북쪽에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모두 퇴폐하여 현 위치로 옮긴 것이라 한다. 향교의 운영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목천현 읍지와 건물 내에 걸린 현판을 통해 향교의 변천을 추정할 수 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목천향교는 목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지점인 흑성산의 동쪽 산록에 동향으로 위치한다. 이곳은 『대록지』[안정복의 구지는 1779년(정조 3)에 편찬되고, 조국인의 신지는 1817년(순조 17)에 편찬됨]나 『호서읍지』, 『목천현지』에 실린 향교가 “현의 북쪽 3리에 있다.”라는 기록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처음 창건되었던 자리는 이곳이 아닌 교촌리 1구 솟대배기 북쪽 술레바퀴산 아래 구향교골이었다.
[변천]
목천현에 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목천향교 안내판에는 ‘중종 18년(1523년)’ 건립이라 하고 있으나 고증 자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대록지』에 의하면 목천향교의 옛 터는 현의 서북쪽 2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후에 성묘가 퇴폐하여 전참봉 한혁(韓赫)이 주관하여 현재의 위치인 현의 북쪽 3리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한편 1992년의 명륜당 중수 공사에서 1642년(인조 20) 12월 초 6일자의 명륜당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 의하면 명륜당 건축 당시의 목천 현감은 신조우(申祖禹)였고, 영건유사(營建有司)는 유학 유인장(柳仁章)·김의(金嶷)·정주(鄭澍)였으며, 모속유사(募粟有司)는 중훈대부 전별제 유인문(柳仁聞)·유학 김해(金垓)였고, 대목(大木)은 승(僧) 진기(眞機)·계순(戒淳)·지영(智英)·학능(學能)·명길(命吉), 공양은 충길(忠吉)·영록(永祿)이었고, 야장(冶匠)은 윤철(尹哲), 양향유사(糧餉有司)는 유학 강흥철(康興喆), 번와유사(燔瓦有司)는 유학 이극태(李克泰)·윤상갑(尹相甲), 색리(色吏)는 신응견(申應堅), 고직(庫直)은 채가시(蔡加屎) 였다.
조선 후기의 목천향교는 대성전(大成殿) 3칸, 동무(東廡)·서무(西廡) 각 3칸, 명륜당(明倫堂) 3칸, 동재(東齋)·서재(西齋) 각 5칸, 청(廳) 3칸, 제기고(祭器庫) 3칸이었다. 유생은 도유사, 장의, 색장이 있어 사림이 맡는데 동재에 거하고, 교생의 정원은 30인으로 양민이 향교에 필요한 역(役)을 맡으며 서재에 거하였다. 향교의 위전(位田)[관아, 사원 따위의 유지를 위하여 마련한 토지]은 43부[시기전 19부], 위수전은 4결 56부[시기전 1결 94부]이었고, 몇 명의 위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서적으로는 『춘추』, 『시전』, 『서전』, 『예기』, 『향례합편』, 『주서』, 『아송』, 『규장전운』 등이 있었다. 대성전의 위판은 『대록지』에는 5성위 송조 4현 우리나라 16현으로 되어 있으나, 『호서읍지』, 『목천현지』에는 5성위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에 걸려 있는 「목천현학 중수기」에 의하면 목천 현감으로 부임한 서상억이 1867년(고종 4)에 중수하였는데, 당시 도유사 한○인(韓○仁), 별유사 송영수(宋英洙), 장의 김정건(金正健)·곽영묵(郭永黙)·유식노(柳植魯) 등이 주도하였다. 한편 『유림 대사전』에서는 1655년(효종 6)과 1694년(숙종 20), 1886년(고종 25)에 각각 보수를 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는 명륜당이 중수되었다. 군수 김용성(金容晟)과 군속 곽영진(郭英鎭)이 주선하여 관에서 250원을 지원하고 장의 이민용(李敏用)을 비롯한 여러 장의들이 50원을 출연하여 명륜당을 중수할 수 있었다 한다.
광복 후 1956년에 문묘가 중수되었고, 1985년에는 전반에 걸쳐 보수를 실시하였으며, 1992년에는 다시 대폭적인 중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계속된 보수를 거쳐 2010년 홍살문을 교체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목천향교는 홍살문을 지나 구릉이 시작되는 경사지에 배치되어 있다. 전면에 강학 공간을 두고 후면에 묘당 공간을 두는 전학 후묘식 배치이다.
정면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자 형 평면의 동재 한 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횡으로 좁고 긴 명륜당 뒷마당이 있고, 그 뒤로 한 단을 다시 조성하여 대성전과 양무를 배치해 두었다. 대성전 앞에는 내삼문과 높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대성전 앞은 작은 중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를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현황]
광복 이후 전국 대부분의 향교가 춘추의 석전제와 삭망의 제향만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향교의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목천향교는 목천읍 일대에서 행해지는 전통 행사의 제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천안시에서는 목천향교 주변을 활용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목천향교는 조선 시대 목천현에 건립된 관학 교육 시설로 공교육을 주도하였다. 조선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교육보다는 성묘 제향 기능이 중시되었는데 목천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후 피폐한 향교의 건물은 중수되었으나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였다. 목천향교가 임진왜란 이후 이건하면서 명륜당이 1600년대 중반에 건립된 것에서도 그러한 처지가 나타난다.
목천향교의 연혁을 보여 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대록지』와 『호서읍지』의 『목천현지』를 통해 목천향교의 규모와 경제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서재 교생 가운데에는 향교의 재정 확보를 위해서 원납을 하고 서재생으로 인정받는 원납 교생도 있었는데, 목천현의 사례에서 유생과 교생이 구분되는 것은 충청도의 실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