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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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義淵夫婦旌閭 |
이칭/별칭 | 언양 김씨 정려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덕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22년 - 김의연 명정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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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22년 - 김의연 정려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80년 - 김의연 정려 화재로 전소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8년 - 김의연 정려 이건 및 중수 |
현 소재지 | 김의연 정려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덕전리 |
원소재지 | 김의연 정려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군 읍내면 와용리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덕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려.
[개설]
김의연은 언양(彦陽) 사람으로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묘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통곡하였고, 절하던 자리가 활 모양으로 움푹 패었다 한다. 그 후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생명을 연장하게 하였다. 부인인 고성 이씨는 남편이 단지 수혈로 사경을 헤매자 밥을 먹지 않아 남편보다 6일 먼저 죽었는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6일 만의 일이었다.
[위치]
김의연 정려는 천안시 목천읍 덕전리에 있다. 목천읍에서 약 5㎞ 정도 북쪽으로 하천을 따라가다 보면 중니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면 남향으로 김의연 정려(金義淵 旌閭)가 세워져 있다.
[변천]
조선 순조 때에 방백과 유현들이 상소하여 1822년(순조 22) 윤 3월 13일에 정문과 함께 하마비가 하사되어 목천군 읍내면 와용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1880년(고종 17)에 세인들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그 후 정문의 초석을 빼어 일반 가정의 집을 짓는 일이 일어나자, 후손인 동몽당 김주현이 아들 김현수와 조카들과 더불어 1968년 현재의 자리에 정려를 다시 세웠다.
[형태]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건물로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고, 원형의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정려의 전면에는 ‘언양 김씨 효열 정문(彦陽金氏 孝烈旌門)’이라 쓴 큰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효자 통덕랑 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지려 열녀 영인 고성 이씨 정려(孝子通德郞朝奉大夫彦陽金義淵之閭烈女令人固城李氏旌閭)’라 각자되어 있다.
정려의 중앙에는 ‘효자 통덕랑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지문 순조 22년(1822) 임오 윤 3월 13일 명정(孝子通德郞贈童蒙敎官朝奉大夫彦陽金義淵之門純祖二十二年壬午閏三月十三日命旌)’이라 각자된 현판과, ‘열녀 공인 통덕랑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처 증영인 고성 이씨 지문 순조 22년 임오 윤 3월 13일 명정(烈女恭人通德郞贈童蒙敎官朝奉大夫彦陽金義淵妻贈令人固城李氏之門純祖二十二年壬午閏三月十三日命旌)’이라 각자된 현판이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는 효와 절의를 강조하던 시대로 한 집안에서 효자와 열녀가 함께 배출되었음을 기리는 김의연 정려는 세대의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