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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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得全 |
이칭/별칭 | 자완(子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개설]
이득전(李得全)은 천안의 이속(吏屬) 출신이다. 연산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학문을 인정받았지만, 가문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가계]
본관은 천안(天安)이라고 하기도 하고, 『영성지』에는 경주(慶州)라고 되어 있다. 자는 자완(子完)이다. 아버지는 호장(戶長)를 지낸 이치문(李致文)이고, 부인은 장계수(長溪守) 이섬(李暹)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대과에서도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2년(중종 7)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간들은 이득전의 출신을 문제 삼아 언관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이미 정사가 끝났으므로 다음에 교체하겠다는 말로 반대하였다. 1514년에 지평(持平)에 제수되자 사헌부(司憲府)에서는 문벌이 미미하다는 이유를 들어 교체를 요청하였고, 이때는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영의정 유순(柳洵)의 건의로 김안국(金安國) 등 28인과 함께 사유(師儒)[사람에게 도를 가르치는 유생]로 선발되는 등 어느 정도 학문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516년에도 사유로 선발되었다.
1516년(중종 11) 사헌부 장령(掌令)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이때에도 지방의 한미한 향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교체되고 말았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시 사관은 사론(史論)을 통하여 이득전의 체직을 요청했던 세태를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가문과 출신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체직되었다.
1518년 성균관의 사성(司成) 결원 시 이득전을 추천하는 이장곤(李長坤)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이득전은] 본시 천안군의 이속이었는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집이 무척 가난하므로 군중(郡中)의 하례(下隷)들이 모두 불쌍히 여겨 더러 의식도 보태주었습니다. 그리고 친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여막에서 6년 동안 지내면서 동리 밖을 나와 본 적이 없었으니, 이것을 보아도 그의 언행이 어떤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또 후배들을 잘 가르쳐서,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 배우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른 뒤 폐조 때 밀려나 용천(龍川)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때에도 일도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배웠는데, 지난번에 약간의 과실로 죄를 입고 파직되었으나 지금은 성균관에 다시 쓸 만합니다.”
이득전은 1519년(중종 14)에 장령에 다시 제수되었지만, 역시 출신이 문제가 되어 결국 교체되고 말았다. 그후에는 사유(師儒) 혹은 사표(師表)로 있다가 1525년(중종 20)에는 사장(師長)이 되었다.
[학문과 저술]
중종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출신 문제로 체직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내내 사유(師儒) 혹은 사표(師表)로 칭해진 것을 보면 학문의 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