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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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繼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개설]
조계남(趙繼南)[?~?]은 직산현 아전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큰 공을 세웠다.
[가계]
본관은 직산(稷山). 백제 개국공신 조성(趙成)의 후손이다. 대대로 직산의 거족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가문이 몰락하여 향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 당시 직산현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명나라 장병이 수시로 왕래하였으며 왜군과의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하였다 이때마다 조계남은 군량을 조달하고 숙영을 도와 전쟁 수행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란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백성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군량미를 마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조계남은 백성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무난히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직산 고을을 거쳐 간 많은 관리들이 “만산이 모두 고사목뿐인데 한 그루 푸른 나무가 있으니 바로 조계남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직산 고을의 관리와 백성이 모두 피난하여 고을이 비어 있을 때도 조계남은 고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통인(通引) 이응명과 관노 언향이 남아 조계남과 함께 고을을 지켰다.
조계남의 활약으로 난중에 직산에 부임했던 현감들은 공적을 인정받아 영전하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1591년(선조 24)에 직산 현감으로 부임하여 1594년(선조 27)에 홍주 목사로 승진한 박의는 현감 재직 시 조계남이 잘 보필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느 현감이 관인(官印)을 분실한 적이 있었는데, 조계남은 현감을 안심시키고 동인(銅印)을 새로 만들어 현감의 문책을 모면시켜 준 일도 있었다. 이 관인은 한일 강제 병합으로 직산현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복호(復戶)의 은전을 입어 향직을 면하고 양반의 신분을 회복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