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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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夢寅 |
이칭/별칭 | 응문(應文),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의정(義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시대 천안에 우거한 문신·학자.
[개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조선 중엽의 문장가 겸 외교가로 크게 활동하였으며, 전서·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유몽인의 동생 유몽표의 아들인 유활(柳活)이 목천의 만매촌[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처음으로 살게 되었으며, 유몽인이 처벌될 때 모두 적몰되었고 1794년(정조 18)에 신원(伸寃)되었으나 제사 지낼 후손이 없어 유활의 후손들이 청절사(淸節祠)를 지어 제향을 받들고 있어 천안과 인연이 되었다.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이다. 할아버지는 사간(司諫)을 역임한 유충관(柳忠寬)이고, 아버지는 진사(進士) 유탱(柳樘)이다.
[활동 사항]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 이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을 때 명(明)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임진왜란 중 유몽인은 명군의 지원병 문제와 왜군의 침략에 대한 대책 강구, 문안사(問安使) 역할 등 대명 외교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세자의 분조(分朝)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특히 1593년(선조 26)에 명나라 장수 송경략(宋經略)이 세자 시강관 2~3명과 경전의 토론을 요청했을 때, 사서(司書) 황신(黃愼)·설서 이정귀(李廷龜) 등과 함께 참여하는 등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재임 기간 유몽인은 세자시강원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병조 참의·황해 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에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왕은 유몽인을 불러 남원 부사로 삼았다. 그 뒤 한성부 좌윤·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였다. 이 일로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화를 면하였으나, 더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해 7월 현령 유응형(柳應浻)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라고 무고하여 국문을 받다가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처형되었다. 서인들에 의해 중북파(中北派)로 몰리면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때 관작의 추탈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책봉된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학문과 저술]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 수학하였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난 이후 성혼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저서로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시문집인 『어우집(於于集)』이 있다.
[묘소]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몽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호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배향하였다. 정조 때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 영당(三賢影堂), 병천의 충절사에서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