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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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民植 |
이칭/별칭 | 유정근(兪政根),만송(晩松),유후단(兪后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10월 17일 - 유민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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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충청도 대표로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3월 - 유민식 북로군정서에 합류해 김좌진을 보좌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5월 - 유민식 독립군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3월 - 유민식 신민부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 집행 위원회 경리부 위원장에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1월 27일 - 유민식 출옥 후 북만주로 이동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2월 - 유민식 일본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7월 23일 - 유민식 평양 복심 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69년 8월 11일 - 유민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유민식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거주|이주지 | 유민식 거주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모전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충청도 대표|신민부 중앙 집행 위원회 경리부 위원장 |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유민식(兪民植)[1898~1969]은 본적지가 충청남도 천원군 성거면 모전리 213번지이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충청도 대표로 선임되었으며, 1925년 3월 신민부에 참여해 중앙 집행 위원회의 경리부 위원장에 선임되어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유정근(兪政根)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유민식은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안고 고국을 떠나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상해로 건너갔다. 유민식은 상해 지역 민단 대표로 활동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무력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홍진(洪震)·신규식(申圭植)·이명교(李命敎) 등과 함께 임정 의정원에 충청도 대표에 선임되었다. 그 후 재정 심사 위원회·예결 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였고, 민단 부장(民團部長)에 임명되어 교민(僑民)의 활동을 총괄하였다.
1922년 3월경 북로군정서 김좌진(金佐鎭)의 요청으로 만주로 건너가, 군정(軍政) 양면에서 김좌진을 충실히 보좌하였다. 1923년 5월 독립군의 군비 강화를 위하여 김좌진의 밀명을 받고 보천교도(普天敎徒)인 신찬우(申贊雨)와 함께 국내에 특파된 유민식은 ‘대한독립군 총사령부 파견 군자금 모집책’ 또는 ‘김좌진 장군의 밀사’로 불렸는데, 주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며 당시 교세가 대단하던 보천교주 차경석(車京錫)을 만주로 데려갈 계획을 세웠다.
유민식은 김좌진의 동생인 김동진(金東鎭)을 비롯하여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김완규(金完圭) 및 김항규(金恒圭)·김병희(金炳僖)·신찬우(申贊雨) 등과 접촉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1월 27일 출옥 후 일본 경찰의 끈질긴 감시를 따돌리고 다시 북만주로 건너간 유민식은, 1925년 3월에 김혁(金赫)·김좌진·나중소(羅仲昭)·조성환(曺成煥)·최호(崔灝) 등과 영안(寧安)에서 재만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 집행 위원회 경리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유민식이 소속된 중앙 집행 위원회는 530명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항일 무장 투쟁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27년 2월에 중일 합동 부대가 신민부의 비밀 본거지를 포위·습격하여, 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한 본부 직원이 모두 체포되었다.
유민식은 1929년 7월 23일 평양 복심 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4년에는 옥중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969년 8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민식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