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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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正九 |
이칭/별칭 | 이재천(李在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의병.
[개설]
이정구(李正九)[1876~?]는 충청남도 목천군 갈전면이 본적이나 그 외 가계나 학력 등은 알 수 없다. 1909년 청주 일대에서 활동했던 한봉서(韓鳳瑞) 의병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재천(李在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7월에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8월에 대한 제국의 정규군을 강제 해산하는 등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항일 의병이 국권 회복을 위해 봉기하였는데, 이정구도 1909년 음력 4월 청주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의병장 한봉수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여,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백자동(百子洞)의 친일 이장 박 모(朴某)를 총살하였다. 박 모 이장이 의병의 소재를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여 동지 2명이 피살당한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1909년 음력 5월 10일에는 충북 괴산군(槐山郡) 서면(西面) 사치(沙峙)에서 동료 의병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 뒤 사격을 가하여 이들 모두를 사살하고, 총 2정·총검 2자루·탄약함 2개·수통 1개·탄환 10발을 노획하였다.
같은 해 음력 8월 15일에도 청주 북강내이면(北江內二面) 화죽리(花竹里)에서 헌병 분견소의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매국 행위를 일삼던 박래천(朴來舛)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또한 의병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같은 해 음력 10월 청주에서 동료 의병 이종칠(李種七)과 함께 군자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어 1910년 3월 9일 공주 지방 재판소 청주 지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공소(公訴)하였으나, 같은 해 4월 5일 경성 공소원에서 기각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정구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