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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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秉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6월 5일 - 최병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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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최병규 중국 북경 대학에서 중국어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최병규 봉천성 안동현에서 정미소 경영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10월 - 최병규 대한 독립군 총단장으로 무장 항일 투쟁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최병규 정의부 제6부 대표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최병규 무장 독립운동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63년 2월 15일 - 최병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병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최병규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연춘리 21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독립군 총단장|정의부 제6부 대표 |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병규(崔秉奎)[1885~1963]는 본적이 충청남도 천안군 북면 연춘리 210으로 되어 있으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22년 10월 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의 총단장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만주 봉천성 신빈현(新賓縣) 사전자(砂甸子)에서 정의부(正義府) 제2소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25년까지 계속해서 정의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최병규는 1916년 중국의 북경으로 유학하여 북경 대학에서 중국어를 수학하였으며, 1920년에는 봉천성(奉天省) 안동현(安東縣)으로 이주하여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이후 최병규는 1922년 10월 중국 동삼성(東三省) 석교촌(石橋村)에 근거를 둔 대한 독립군의 총단장으로 부하 몇 명을 이끌고 노령(露領)의 추풍(秋豊)으로 가서,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 총사령관 김규식(金圭植)으로부터 장총 400정과 다량의 탄환을 수령하여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4년 봉천성 신빈현 사전자에서 정의부 제2소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자금 모금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길림성 화전현에 본부를 둔 만몽신당(滿蒙新黨)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5년에는 정의부 제6부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최병규는 1933년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묘소]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360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병규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