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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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種黙 |
이칭/별칭 | 현경(玄卿),한산(翰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개항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현경(玄卿), 호는 한산(翰山)이다. 민승세(閔承世)의 아들로 민명세(閔命世)에게 입양되었다. 천안 직산에 경위학교를 설립한 민철훈(閔哲勳)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민종묵(閔種黙)[1835~1916]은 1874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은정사(謝恩正使) 한돈원(韓敦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1876년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사간원 지평·사복시 정(司僕寺正)·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외무성을 시찰하였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립되자 통상사 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성균관 대사성·한성부 우윤·병조 참판을 거쳤고, 진하사은 겸 세폐부사(進賀謝恩兼歲幣副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의 세관 업무를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1883년부터 이조 참판·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한성부 판윤·형조 판서·농상사구관(農商司勾官) 등을 역임하였다. 1886년에 예조 판서와 홍문관 제학, 1887년에 공조 판서와 사헌부 대사헌, 1888년에 형조 판서와 홍문관 제학 및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1889년에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었다. 그 뒤 3년간 방곡령 사건, 조일 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 체결, 제주(濟州) 어채(魚採) 문제 등 주로 외교와 통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1889년 일본 어선단의 선박 24척이 울릉도에 입도하여 곡물을 자르고 관가와 민가를 부수는 등 크게 소동을 일으키자, 당시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고 있던 민종묵은 일본 공사관에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불법 행위에 대해 항의하며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대리 공사 곤도신조[近藤眞鋤]는 민종묵에게 사죄하고 일본 어민들의 불법 행위를 부산·원산 영사에게 조사해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1892년 함경북도 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1894년 지중추부사, 1896년 장례원 경(掌禮院卿)을 거쳐 1897년 외부대신·홍문관 학사·탁지부대신, 1898년 중추원 일등 의관(中樞院一等議官)·홍릉 제조(洪陵提調)로 임명되었다. 1898년 외부대신이 되어 한아 회사(韓俄會社)를 설립하여 절영도(絶影島)를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저탄소로 조차해 주려다 독립 협회의 탄핵을 받았다.
1898년 11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시정의 개혁을 요구하던 독립 협회를 무력으로 해체하기 위해 미국·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으나, 독립 협회 회원들이 강력하게 반발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뒤 1899년 궁내부 특진관·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내부 서리대신·농상공부 서리대신 등을 거쳐, 1910년까지 법부 서리대신·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농부대신·양지아문 총재(量地衙門總裁)·예식원 장(禮式院長)·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등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학문과 저술]
『일본 문견록(日本聞見錄)』, 『일본 각국 조약(日本各國條約)』, 『일본 외무성 시찰기(日本外務省視察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