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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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慶鎬 |
이칭/별칭 | 회경(會慶),구당(鷗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근대 개항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개설]
일본 정부는 1910년 8월 22일에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10월 1일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부임하여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한일 병합이 이루어지자 일본 정부는 조선 황실과 귀족 및 고관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각종 은전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왕족과 한일 병합에 공이 있는 자 등 76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그중에서 8명은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하였는데, 조경호(趙慶鎬)[1839~?]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천안인의 자존심을 지켜낸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회경(會慶), 호는 구당(鷗堂)이다. 참판을 지낸 조기진(趙基晉)의 아들이며,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위이다.
[활동 사항]
1865년(고종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가 되었다. 1866년에 승정원 주서, 1869년에 홍문관 부제학, 1870년에는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71년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74년에 이조 참판을 지냈고, 1880년 도총부 도총관에 발탁되었다가 이어서 형조 판서를 지냈다.
1881년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1882년에 한성부 판윤·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던 중 명성 황후의 장례 때 종척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외직에 나갔으며, 광주 유수로 재직할 때 흉년이 들어 민생이 불안하자 환곡을 정퇴(停退)하는 등 백성들의 진휼(賑恤)에 힘을 썼다.
1883년 다시 한성부 판윤에 기용되었다가, 1889년 예조 판서에 취임하였다. 1895년 판의금부사에 발탁되었고, 1897년 중추원 1등 의관과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1898년 흥선 대원군과 부인인 여흥 대부인(驪興大夫人)의 명정(銘旌) 서사관(書寫官)으로 활약하였으며, 1903년에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로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1905년에 홍문관 학사를 역임한 뒤 1907년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으로 활동하였고, 만년에는 정계에서 물러나 목천현[현의 천안시 동남구 북면 양곡리]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일본 정부가 남작 작위를 수여하였으나 조경호는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당황한 조선 총독부는 아들인 조한국에게 습작의 형식으로 작위를 떠넘기려 했으나 아들 또한 이를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