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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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熙人 |
분야 | 종교/신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내수 |
활동 시기/일시 | 1893년 2월 - 이희인 동학 상소문에 대표로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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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3년 4월 - 이희인 보은 집회 때 대표로 선정되어 선무사 어윤중과 회담 |
몰년 시기/일시 | 1894년 - 이희인 사망 |
활동지 | 이희인 활동지 - 충청남도 목천 세성산 |
성격 | 동학 지도자 |
성별 | 남 |
[정의]
근대 개항기 천안 출신의 동학 지도자.
[개설]
이희인(李熙人)[?~1894]은 김복용(金福用)과 함께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목천 세성산 전투를 지휘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세종의 열 번째 아들인 담양군(潭陽君)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서산 군수를 역임한 이수익, 아버지는 이봉래이다. 부사를 지낸 이학래가 큰아버지이고, 참봉 이희민이 형이다.
[활동 사항]
1893년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이 전개되어 보은집회가 열리자, 정부에서는 어윤중(魚允中)을 파견하여 선무하였다. 이때 동학도회소에서 이희인을 대표로 선정하여 어윤중과 담판을 짓게 하였다. 당시 이희인은 교조 신원을 얻어내지는 못하였지만, 무력 충돌을 막아 동학교도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희인은 1893년 2월에 허연, 서병학 등과 함께 6명의 대표 중 한 명으로 동학 상소문에도 서명한 일이 있었다.
1894년 동학 남접의 2차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이희인은 김복용과 함께 병사를 일으켰고, 목천현·천안군·전의현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양곡을 거두어 작성산과 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남으로 조령을 넘으면 영남으로 통하고, 북으로 천안을 거쳐 서울로 가는 중요한 도로가 두 산의 중간에 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희인과 김복용은 겨울을 앞두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적성산에는 초막을 짓고 세성산에는 토성을 쌓았다. 당시 목천현은 동학군의 수중에 있어서 농민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세성산 동학 농민군의 편성은 상당한 전투 조직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이희인은 전반적인 행정을 맡은 수반이었고, 효장(驍將)에 김복용, 중군(中軍)에 김영우, 화포장(火砲將)에 원전옥이 추대되어 전투에 대비하였다.
이때 정부군의 우선봉장으로 출병한 이두황은 죽산(竹山)에 이르러 동학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관군은 청주 병영과 연합하여 북면 양지리에 유진소를 두었다. 이두황은 유진소 주변의 민가를 불사르고 수색을 벌여 동학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관군은 세성산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하여 문의(文議), 연기(燕崎), 안성(安城), 죽산(竹山) 등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후 관군은 세성산 토성을 공격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동학 농민군은 해 질 무렵 진지를 버리고 퇴각해야만 했다.
세성산의 거점을 잃고 며칠 후 동학 동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전을 겪게 되었다. 이두황은 세성산에서 김복용을 체포하였으나, 이희인은 체포하지 못하였다. 이희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과로가 겹쳐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웃 마을의 사돈집에 몸을 숨겼으나, 마을 사람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어 천안 북면 사구실에서 부하들과 함께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