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2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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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礎石- |
이칭/별칭 | 선랑암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장송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 |
집필자 | 김동욱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6월 30일 -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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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설렁 바위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장송리 |
성격 | 전설|암석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선랑|꽃사슴|낭자|왕건 |
모티프 유형 | 암석 명명 전설|고려의 건국에 항거한 후백제 유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장송리 초석골의 설렁 바위와 관련한 암석 유래담.
[개설]
천안시에는 태조산(太祖山)을 비롯하여 유왕골 등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877~943]과 관련된 지명 전설이 많이 전한다. 천안시가 후백제와의 격전지였던 까닭이다. 「초석골 설렁 바위」는 선랑과 꽃사슴을 기르는 낭자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과 관련된 암석 유래담이자, 고려 건국 당시 항거하였던 후백제 유민들의 정신을 내비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채록/수집 상황]
민병달·이원표 등이 조사하여 1998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지금의 천안시 목천읍 지역에 후백제 때 인물이 잘생기고 무예가 뛰어난 한 선랑(仙郞)이 살고 있었다. 선랑은 사냥을 해서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곤 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아름다운 꽃사슴 한 마리를 발견한 선랑은 그 뒤를 따라갔다. 꽃사슴은 대궐 같은 큰 집으로 들어갔다. 선랑이 따라서 들어가 보니 집 안에 선녀 같은 낭자가 있었다.
낭자에게 한눈에 반한 선랑은 화살에 글을 적어 낭자의 곁으로 던지고는 그대로 산막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선랑은 낭자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낭자의 집으로 향하였다. 선랑은 가다가 큰 바위를 번쩍 들고 갔다. 낭자의 집 근처 언덕에 놓으면 담을 오르지 않아도 낭자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랑이 개울가를 지나는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선랑은 바위를 냇물에 던지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들판을 지나는데 꽃사슴의 뒤를 쫓아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는 낭자가 꽁꽁 묶여 있었다. 맨손으로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히고 달려가 보니 낭자는 이미 칼을 맞고 죽어 있었다. 선랑은 낭자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고 평생토록 낭자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실제로 천안시 동남구 동면 장송리에는 안동 김씨가 처음 정착하였다는 초석골 앞 냇가에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바로 선랑이 들고 가다가 냇물에 던진 바위이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설렁 바위’라고 불렀다. 설렁 바위로 부른 데에는 두 가지 유래가 있다. 하나는 이 바위 위에 올라가면 마음이 설렁설렁 움직여서 ‘설렁 바위’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랑이 떨어뜨린 바위라는 뜻으로 ‘선랑 바위’라고 부르던 것이 ‘설렁 바위’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후에도 순응하지 않는 후백제의 유민인 목천의 토착 세력들에게 다섯 가지 짐승에서 딴 성을 만들어 내렸는데, ‘선랑’도 그중 하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모티프 분석]
『대록지(大麓誌)』에는 대홍수 때 선랑(仙郞)이 진천(鎭川)에서 바위를 타고 오다가 초석골 앞 냇가에 버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구전에는 선랑과 꽃사슴을 기르는 낭자 사이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달리 전한다. 또한 선랑이 고려 건국 후 왕건으로부터 다섯 가지 짐승의 성을 받은 사람의 하나라고 함으로써 고려 건국에 항거하였던 후백제 유민임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