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2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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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慰禮山-地名由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동욱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6월 27일 - 상명 대학교 구비 문학 연구회에서 박규진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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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10월 5일 - 『구비 문학 대관』에 수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3년 2월 4일 - 충남 대학교 백제 문화 연구소에서 한영수, 김학성, 김갑순에게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3년 7월 - 『위례산성』 부록에 수록 |
관련 지명 | 위례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 |
관련 지명 | 용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
관련 지명 | 위례성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
채록지 | 기로리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기로리 |
채록지 | 양대리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
채록지 | 대평리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대평리 |
성격 | 전설|지명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백제의 왕[의자왕]|백제군|고구려군|왕의 처남|왕의 사위|왕의 큰아들|온조왕 |
모티프 유형 |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통곡한 데에서 이름이 유래한 위례성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과 천안시 동남구 북면에 전해 내려오는 위례산성과 관련한 지명 유래담.
[개설]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와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사이에 자리한 위례산성(慰禮山城) 터에는 지명 유래담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위례산의 지명 유래」는 부여 백마강(白馬江)까지 혹은 서해까지 뚫려 있다는 용샘에 얽힌 이야기, 위례산(慰禮山)이라는 이름의 유래 등 위례산에 있는 여러 지명들의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위례산의 지명 유래」는 상명 대학교 구비 문학 연구회에서 1989년 6월 27일 박규진[45세, 남,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기로리]에게 채록하였다. 1996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구비 문학 대관』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96년 성환 문화원에서 발간한 『우리 고장의 민속』에도 수록되어 있고, 충남 대학교 백제 문화 연구소에서 2003년 2월 25일에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에서 한영수[69세, 남], 정희영[76세, 남], 이보훈[81세, 남], 김영근[72세, 남], 이보희[78세, 남]에게 채록하여 2003년 7월 서경 문화사에서 발간한 『위례산성』 부록에 수록하였다.
[내용]
본디 용왕의 아들인 백제의 왕은 용샘을 통해 공주(公州)와 위례산성을 오가며 고구려군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위례산이 천연적으로 유리한 지형인 데다가 백제의 왕이 조화를 부려 백제군은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평소 왕을 못마땅하게 여긴 왕의 처남은 여동생인 왕비에게 왕이 사람이 아닌 용이라는 말을 듣고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왕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미끼로 건 낚싯대를 강물에 담가 놓고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위례산성에서 종일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피로에 지친 왕은 용으로 변하여 공주로 되돌아올 때쯤 몹시 배가 고팠다. 왕은 때마침 평소 좋아하는 제비가 눈에 띄자 급히 입으로 물었다. 그 순간 왕의 처남이 힘껏 낚싯대를 채자 왕은 낚싯바늘에 걸려 그만 죽고 말았다.
왕이 죽은 다음 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백제군이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였다고 해서 울애산 또는 우래산이라고 하던 것이 위례산으로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처남이 아니라 사위가 왕이 되려고 백제의 왕을 죽였다고 전한다. 그때 성거산(聖居山)에 주둔하고 있던 왕의 큰아들이 큰 창을 세워 놓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왕 노릇을 하자고 하였다. 사위가 먼저 창을 뛰어넘으려는데 왕의 큰아들이 창을 들고 있다가 뛰어넘으려는 매부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매부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산이므로 승거산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성거산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밖에 위례산에서 활 쏘는 연습을 한 곳을 사당골이라 하였는데, 이는 원래 사장골[射場谷]에서 유래하였으리라 추측한다. 또한 말먹이를 쌓아 두던 사초골, 말을 먹이던 말마골, 군사들이 주둔하던 군단이,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문을 세웠다는 부소문이[扶蘇門嶺] 고개 등 각 지명이 생겨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모티프 분석]
「위례산의 지명 유래」는 위례산이라는 지명과 그밖에 위례산과 관련된 지명들이 생긴 유래를 전해 주는 지명 유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