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5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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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目支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삼한 시대 때 직산 지역을 관할했던 소국(小國).
[개설]
목지국(目支國)은 초기 철기 시대 이래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에서 형성, 발전되어 온 토착 정치 집단의 하나로, 백제(百濟)가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 연맹체의 중심 세력이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지국의 존속 시기 및 진왕(辰王)의 지배 영역과 지배 성격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목지국 진왕은 삼한 전체를 통솔한 지배자라는 해석과 부족 연맹장으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존재라는 해석, 3세기경의 백제 고이왕(古爾王)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형성 및 변천]
목지국은 마한을 포함한 삼한을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성립 시기는 기원전 4세기로부터 기원 전후한 시점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목지국의 신지(臣智)인 진왕은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서 진한·변한 소국의 일부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스스로의 의사로 마한 소국 연맹체의 연맹장이 될 수는 없는, 정치권력이 아직 미약한 지배자였다.
목지국의 멸망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목지국의 쇠퇴는 군현 세력의 변동과 백제의 성장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한(韓) 세력과 중국 군현 세력과의 충돌 내용과 함께 한이 멸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246년(고이왕 13) 일어난 백제와 중국 군현의 충돌로 이해되기도 하며, 중국 군현 세력이 한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백제에 의해 목지국 세력이 병합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온조왕 26년조에는 백제가 사냥을 한다고 하면서 마한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마한은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으로 그 병합 시기는 고이왕 시기로 추정된다. 목지국의 명칭이 3세기 중엽 이후부터 보이지 않는 점도 그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목지국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稷山)을 포함한 천안 지역에 비정하는 견해가 우세하며, 그 이외에 인천, 예산, 아산만 일대,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전라북도 익산, 금강 유역,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 등지에 비정되기도 한다.
목지국은 백제의 성장에 따라 그 중심지가 천안·직산 일대에서 나주 반남면으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주(南走) 기록이나 청동기 유물 및 고분군의 분포 상태 등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상호 결합하여 제시된 견해들이다.
목지국을 천안 지역에 비정하는 유력한 근거는 청당동에서 조사된 원삼국 시대 분묘 유적인 주구묘(周溝墓)와 출토 유물인데, 이들 자료가 다른 지역보다 우월성을 가진 점에 있다. 또한 『삼국사기』온조왕 24년조에 보이는 웅천(熊川)을 안성천에 비정하고, 온조왕 26년에 병합된 마한을 목지국으로 보아 그 위치를 천안에 비정하는 것이다.
[관련 기록]
『삼국지』위서 권30 동이전 한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모두 50여 국이 있는데, 큰 나라는 만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한다.”
『후한서』권115 동이열전 한전에는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여러 국가의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며, 『한원』소전 「위략」에는 “무릇 소국이 56국이 있으며, 모두 십여만 호이다. 진왕이 목지국을 다스리는데, 목지국에는 관리가 있으며, 또한 신지(臣智)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