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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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개설]
경상북도의 최남단이자 밀양강의 최상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청도는 지형적으로 남쪽 청도읍 유호리를 제외하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문에 예전에는 고개를 넘어야만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도군 내 용각산 지맥을 중심으로 산동과 산서로 구분되어 청도군 내 지역들도 고개를 건너야 한다.
청도군 내에는 총 206개의 고개가 있다. 이 중 읍면 내에 있는 것이 94개, 읍면 간에 있는 것이 53개로 청도군 내를 연결하는 고개는 총 147개가 분포한다. 또한 주변 청도군과 시군을 연결하는 고개는 59개이다. 이는 청도군 내 이동뿐만 아니라 다른 시군과의 연결에서도 고개가 중요한 교통로이자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음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된다.
[용각산 곰티재, 산동과 산서를 연결하다]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 청도군의 지형은 용각산의 곰티재를 중심으로 산동과 산서로 구분된다. 용각산은 청도에서 주요한 산 중 하나이다. 옛 기록에서는 용각산을 소조산(小祖山)이라 하였다. 풍수지리학에서 백두산을 조산이라 하였는데, 소조산은 조산 다음으로 위상이 높은 산으로 백두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되는 산이다. 즉 용각산은 조산인 백두산에서 나온 줄기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오산지(鰲山志)』에는 “단석산 대간룡에서 한 산줄기가 서쪽으로 100여리 갈라져 나와 군청 소재지의 북동 지점에 도달했을 때, 한 봉우리가 우뚝 솟으니 갑령이라 불리며 특별하게 소조산이 된다. 그 갑봉서 한 산줄기가 남동쪽으로 흘러 곰티[熊峙]를 지난 후 중산으로 이뤘다가 건령으로 넘어 오례산으로 솟아 유천 주산이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갑령이란 용각산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청도읍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중심 산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듯 청도읍에서 갑(甲) 방향에 있어 갑령이라 불리는 용각산은 일찍이 청도군의 동서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산동 사람들이 산서로 가기 위해서, 산서 지역의 사람들이 산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용각산 줄기의 한 부분인 높이 300m에 위치한 곰티재를 지나야 했다.
곰티재는 일찍이 『오산지』에도 곰티 또는 웅치(熊峙)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곰티재 아래의 첫 마을은 곰태 마을이라 불린다. 곰티재는 곰의 형상을 닮아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일설에서는 곰이 나올 만큼 험한 고개길이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전한다. 험한 곰티재는 비단 그 위치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청도는 일찍이 사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징으로 6·25 전쟁 전후로 하여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곳 중 하나였다. 1949년 2월에서 1951년 2월까지 청도 지역에서는 빨치산 협력과 남로당 가입, 또는 국민 보도 연맹 가입 등의 이유로 민간인 집단 살해 사건이 발생하는데, 집단적으로 살해당하는 곳이 바로 매전면 곰티재와 사촌리 승학골이다. 곰티재의 험로를 대신하여 알려주는 사건 중 하나이다.
국도 20호선이 지나는 곰티재는 포장된 2차선 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산동에서 산서로 이어지는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국도 20호선이 포장되기 전까지 곰티재는 도보로만 다닐 수 있는 임도였던 곳이다. 당시의 곰티재는 지금의 국도 20호선보다는 약간 북쪽으로 들어간 곳으로, 험난하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넘을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후 신작로가 개통되고 국도 20호선이 건설되면서 지금의 곰티재를 지나게 되었다.
곰티재의 건설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산동과 산서가 연결되었지만, 높이 300m를 넘는 고갯길에 조성된 도로는 적은 강설량과 강우량에도 사고의 위험이 높아 교통이 통제되기 일쑤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청도군은 일찍이 지역 발전의 가장 큰 역점 사업으로 곰티재 터널을 추진하였고, 2011년 9월 착공하여 2013년 6월 30일에 개통하였다. 곰티재 터널은 단순히 산동과 산서를 연결하는 터널만이 아니다. 그동안 산동 지역은 청도읍과 화양읍 등 주요 읍면이 밀집해 있는 산서 지역에 비해 낙후된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행정력과 경제력 등이 미치지 못한 오지로서 인식되었다. 곰티재 터널의 개통은 이렇듯 산서 지역에 비해 낙후되었던 산동 지역의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곰티재 터널의 개통으로 ‘S’자 길을 오가며 고개를 넘었던 이야기는 이제 구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운문재, 철과 소금이 넘나들던 곳 영남 알프스를 넘다]
산동 지역은 태백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소위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주봉들이 분포하는 곳이다. 산동 지역에는 운문산, 가지산, 문복산, 억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분포한다. 운문재는 운문댐을 지나 방지 초등학교 문명 분교장 앞 삼거리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개이다. 왼쪽으로 문복산[1,014m], 오른쪽으로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이 위치하며 그 사잇길을 운문재라고 한다. 지나가는 구름도 산허리를 넘지 못한 채 구름문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운문재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청도군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청도군을 울주군, 경주시와 연결해 주는 고개이다.
동해안에서 온 물자가 경상도 내륙 지역인 고령, 창녕으로 가기 위해서 가장 짧은 길은 울주군을 지나 운문재를 넘는 길이다. 하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이곳은 청도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한 곳으로 과거 신라 시대부터 철을 제련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근세에는 송진 채취와 산판을 위한 인부들만이 거주하는 곳으로도 알려질 정도의 험한 곳이었으며, 깊은 산중이었다. 옛 부터 울산 지방에서 만들어진 소금을 비롯한 해산물이 뭍으로 들어오는 길이었고 특히 6·25 전쟁을 전후로 공비들의 이야기는 운문재에서 험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있었음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운문재 고갯길에는 수많은 민간 전설도 전해진다.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 ‘원광의 신통력’, ‘나팔고개’ 등의 전설이 전해짐과 동시에 조선 헌종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고개를 넘으며 봉변을 당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하지만 2012년 현재 험준한 고갯길을 따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던 운문재의 삼계리 계곡은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한때 산판꾼과 무장 공비들이 차지했던 자리에는 오랜 기간 휴식년제가 시행되어 자연 생태계가 되살아났다고 보고되고 있다. 청정 지역으로 이름난 삼계리 계곡에는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며, 특히 여름에는 열대야를 피해 인근 대구광역시와 울산광역시에서 찾는 피서객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청도를 외부와 연결된 고개 중 가장 험난한 길이자 고개인 하나인 운문재를 넘기 위하여, 2012년 청도군은 이곳에 터널을 개통하기로 계획하고 있다.
[팔조령, 영남 대로를 이어주다]
곰티재가 청도군 내부를 연결하고, 운문령이 동해안을 연결하는 주요 고개였다면 팔조령은 청도군민뿐만 아니라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청도군 내 고갯길에서 가장 이용도가 높았던 고개로 추정된다. 1760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부터 1832년 제작된 『청도군 읍지』 청도군 지도, 이후 제작된 『1872년 지방도』 경상도편에는 청도의 북쪽에 팔조령을 표시하고 있다.
영남 대로의 여덟 번째 길목에 위치한다고 하여 소위 팔조령이라 불리는 이곳은 시대에 따라 세 개의 길이 있다. 즉 팔조령은 하나지만 이곳을 지나는 길은 조선 시대 영남 대로의 일부분으로 지났던 길과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신작로, 그리고 1998년 터널 개통에 따른 새로운 길이 있다.
대구와 청도로 이어지는 영남 대로 팔조령은 여덟 명이 모여야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험한 길이다. 옛 길은 청도에서 가자면 군자정을 지나 샛별 장터에서 들 가운데로 가는 길이 있따. 이 길은 청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한 옛 칠곡 초등학교에서 왼편으로 올라가며 저수지 아래에 큰 느티나무 옆에 신당이 하나 있다. 이 신당은 마을의 안녕과 지나가는 길손의 안녕을 비는 기원문이 현판에 게시되어 있어 옛 길이 험난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팔조 저수지를 지나 팔조령으로 이르는 직선 도로는 청도에서 대구로 가기 위한 가장 짧은 길이다. 하지만 팔조령을 오르는 길을 그대로 가야 한다는 점에서 한숨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가파른 곳이었으며, 밤중 혼자서는 오르지 못하는 험한 도로였다. 이 때문에 팔조 저수지 아래에는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안전을 기원하며 매년 동제를 올리던 팔조령 신당이 위치한다.
지금은 옛길로 다니는 사람은 없고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를 따라 다녔으나 신작로 역시 험한 길이어서 터널과 함께 새로이 건설된 길은 1998년에 완공되었고 2012년에는 왕복 4차선으로 개통되어 현재에 이른다.
옛 신작로는 높은 산령을 넘기위한 고갯길로 ‘Ζ’ 모양으로 만들어진 정상 부근의 길을 신출내기 운전사는 급커브를 돌지 못하여 애를 먹은 애환이 담겨있기도 하다. 팔조리 1번지에는 옛 주막이 있었고 지금은 휴게소로 변하여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의 휴식 장소를 마련해 주고 있다.
[마령재, 현풍과 창녕 사람을 풍각장으로]
청도군의 서쪽 끝에 위치한 풍각면 금곡리는 마령재를 통해서 경상남도 창녕군 그리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과 연결된다. 비슬산 지맥에서 비롯된 이곳에서는 풍각장과 창녕군 그리고 화원읍을 연결하는 고개들이 있는데, 비티재와 방골재, 마령재가 그것이다.
이 중 가장 통행량이 많았던 것은 마령재이다. 남북으로는 난두산과 수복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동서로는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와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 사이에 있는 마령재는 마치 또는 말치, 마랑재라 불린다. 이곳으로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것은 마령재가 서쪽으로는 창녕군 대합면과 성산면 등 창녕의 북부권, 유가면·현풍면 등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남부권이 위치하며, 청도의 풍각면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일과 6일 열리는 풍각장은 일찍이 우시장으로 유명하였던 곳이다. 이곳으로 소를 몰고 오는 사람들과 풍각면의 풍각 고추와 쌀을 구입하기 위하여 땅콩 같은 농산물을 이고 마령재를 넘어오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마령재를 넘어 위치한 첫 마을 금곡리에 일찍이 주막이 성업하고, 주막에서 눈을 붙이며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소를 팔았던 돈을 도박이나 도둑을 맞아 잃어버렸다는 숱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도 이곳 마령재 시작되는 금곡리이다. 또한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서 창녕까지는 인민군이 도달하였으나 인민군 지도에는 이 길이 표시되지 않아서 인민군이 침범하지 않은 곳이 마령재이다.
마령재의 자리를 비티재에게 넘겨주게 된 것은 6·25 전쟁 이후 작전 도로가 개통되면서이다. 6·25 전쟁 직후 작전 도로가 신작로가 되면서 비티재에 버스가 다니고 부터 풍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비티재를 통해 창녕과 청도를 오가게 되었다. 2012년 현재 마령재는 사람이 다니지 않은 폐도가 되었으며, 비티재는 청도군을 동서로 이어주는 국도 20호선이 지나며, 정상에는 작은 휴게 공간과 음식점이 위치하고 있다. 비티재 역시 구불구불한 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도로로서 적은 강설량에도 통제되는 도로이지만, 아직 터널을 뚫기 위한 계획은 세워지지 않고 있으며, 2차선 도로는 통행에 따른 위험으로 인하여, 현재 확장을 위한 주변 공사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