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8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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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讓 |
영어음역 | Gim Siyang |
이칭/별칭 | 김시언(金時言),자중(子仲),하담(荷潭),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에 정착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시호는 충익(忠翼). 할아버지는 영상공 김석(金錫), 아버지는 비안현감을 지낸 김인갑(金仁甲),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활동사항]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1607년 승정원주서, 1609년(광해군 1) 예조좌랑겸지제교를 지낸 후 1610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1년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 향시(사마시)에 출제한 시제(詩題)가 광해군의 실정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1618년 영해(현 영덕군)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 후 유배에서 풀려나 예조정랑, 병조정랑, 홍문관수찬, 교리를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 홍문관응교겸문학, 1626년 사간원정언, 경상도관찰사, 1629년 평안도관찰사겸체찰부사, 1631년 병조판서·팔도도원수·사도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1633년 형조판서겸도원수로 척화(斥和)를 반대하다 영월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634년 지중추부사, 한성판윤, 경주부윤, 호조판서겸동지춘추관사,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를 지낸 뒤 1634년 9월 병조판서겸사도도원수에 임명되었다. 1635년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했다. 1636년 청백리에 피선되어 숭록계(崇祿階)에 오른 후 판중추부사를 눈병으로 사직하고 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서 말년을 보냈다. 1641년(인조 19)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할 때 다시 판중추부사겸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눈병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1643년(인조 21) 별세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荷潭集)』, 『부계기문(涪溪記聞)』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선영에 있다. 상석 일체와 동자석 2기, 망주석 2기, 문관석 2기, 묘비가 있고 묘 정면에 장명등 2기가 있다.
[상훈과 추모]
함경북도 회령군 소재 사당에 배향되었고,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선영에 1670년(현종 11) 당대의 문장가인 조경이 찬하고 이정형이 글자를 새긴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