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C01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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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경수, 윤정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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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말
비산1리를 나와 남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비산4리 새말이 왼편으로 있었다. 한적해 보이는 새말을 지나니 오랫말을 알리는 마을 비석과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농번기로 바쁜 철이지만 오후 시간이 되니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입구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르신들께 오랫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상열 할아버지(81세)는 오랫말에서 나고 자랐으며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에 속한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비산2리가 오리나무가 많아 ‘오릿말’로 불리다 현재는 ‘오랫말’이라 불린다는 마을 지명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옛날에 오리마을이라고 했어. 여기 이 앞에 숲이 오리나무가 많이 있어가지고 지명을 오리마을이라고 했다고. 오리나무는 지금 산에도 많이 있지만 오리나무라는 것이 많이 없어졌어요. 옛날 재래종 오리나무가 있어요. 지금 있는 오리나무랑은 달라. 여기 오리나무 숲이 많이 있어가지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 논이 금정을 했어요, 토금을 하니까 거기서 오리나무 이만한 게(한 아름도 넘는 크기였다고 함) 나오더라고. 그래서 오리나무 동네다. 그런 거지. 오리나무는 가구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지만 약해.”
할아버지는 오랫말이라는 지명 유래와 함께 해가 드는 것에 따라 양달말, 음달말로 나뉘며, 마을에 있는 이 길이 경계가 된다고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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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마을의 양달마을 풍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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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말의 양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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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마을의 양달마을 풍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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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말의 음달마을
“우리 동네만은 오리나무 숲이 많았다고 해서 오리나무가 있다고 해서 ‘오릿말’이라고, 중간에 왜정 때는 ‘조도청’이라고 해서. 일찍 조(早) 이를 도(噵)라고 해서. 해가 일찍 떠서 그렇지. 여기는 음짓말, 양지말이라고. 저쪽은 음지가 들고 이쪽은 양지가 들고 그래서 그렇지 그래서 음지말, 양지말이라고.”
그런데 마을의 이름에 대한 문헌자료를 보면 오랫말은 조선시대부터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까지 충주군에 속한 땅이었으며 조도리(早稻里)라 기록하고 있어, 마을에서 조사한 지명이야기와 한문의 도(道)자가 틀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마을은 올벼농사가 잘되었던 마을이라고 하여 일찍 조(早), 벼 도(稻)자를 썼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오랫말의 유래 외에 오랫말에 형성되어 있는 들과 골 중 특이한 유래가 있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높은 산이 없이 평평한 마을은 들에 관련된 이름이 많았는데 구래들, 오랫말들, 외내뜰이 있었다.
“들은 이쪽에 너머에는 ‘구래들’이고 여기가 ‘오랫말들’ 산 너머는 ‘외내뜰’이고.”
외내뜰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으니 내가 있어서 외내뜰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을 근처에 있는 샘과 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있으니까 내가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 너매는 고랑이 깊고 그래서 ‘구수골’ 여기 앞이 구래들. 옛날부터 가뭄을 안타. 지금도 편리하기 위해서 관정을 팠지만 예전에는 관정 없이도 물 걱정을 안했다고.” 음달말 앞쪽 논 가운데에 있는 날샘을 가리키며 “날샘이 있어서 물 걱정을 안 한 이유도 있나요?”하고 물으니, “그럼, 날샘의 영향도 있지. 연못 같은 것은 판 것도 없지.”라고 말하며 날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탑골’, 능이 있었다고 하여 ‘능안’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거는 옛날에 있던 이야기인데, 확실하지는 않아. 저기 저 구렁에 옛날에 탑골이라고 하는데, 탑이 있었어.”
“누가 세웠는지는 아나요?”
“누가 세웠는지 옛날 어른들도 모르지.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게, 탑이 현재도 거기 있어. 근데 이게 산 너머로 넘어 갔어. 여기 있던 것이 저리로 넘어 가서 여기를 ‘탑골’이라고 부르지. 탑이 있었는데 산 너머로 옮겨 갔다고,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개간할 적에 큰 돌이 나와서 탑이 있었다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지.”
음달말 뒤쪽으로 깊게 형성되어 있는 탑골의 유래에 대해서 말해주고는 곧 능안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능안의 위치를 가르쳐 주기 위해 음달말 뒤쪽에 산 밑으로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정말 능이 있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은데 이름 탓에 예전에 도굴꾼들이 수시로 왔다고 한다.
“능안이라고 하는데 능이 있어서 능이라고 부르는지 잘 몰라. 그런데 8·15해방 되고 나서 도굴꾼이 수시로 와서 능안이 어디냐고 불어봐, 그럼 여기라고 알려주고 하는데 작대기를 가져와서 막 쑤셔보고 하더라고. 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능안이라고 해.”
할아버지는 능안이라 불렸던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