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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에게 바치고 개혁을 주창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김홍집 을 탄핵하고, 개화에 반대하는 연명 상소인 만인소를 올렸다. 이때 영남 지역에서는 개령향교 가 중심이 되어 만인소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개령향교 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역사의 주요한 고비 때마다 지역 여론을 대변하며 향풍(鄕風)을 이끌어 온 개령향교 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는 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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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철 [1927년생]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개령향교 에 오른다. 비가 새는 구석은 없는지, 담장은 멀쩡한지, 마치 어린아이 돌보듯 매일 개령향교 를 보살피는 일이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일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지.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자가 대뜸 향교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 말문이 탁 막히더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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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했던 것이다. “아이고, 나 죽네. 살려 주이소” 길동의 비명 소리가 동부리 하늘을 진동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내신정 에서 개령 관아와 개령향교 에 미리 연통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넋이 반쯤 나간 길동이 멍석에서 기어 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이놈, 우리 동부리 를 욕보이지 말고 당장 마을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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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지역 유림들의 끈질긴 복현 상소 끝에 개령현 은 폐현된 지 8년이 지난 1609년(광해군 1) 마침내 복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해로 무너진 후 방치되어 있던 개령향교 는 현감 이창거 등이 주동이 되어 경관이 수려한 유동산 아래 감천 변에 새로 중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역모지군(逆謀之郡)으로 몰려 참담함에 신음하던 지역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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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그리 낯빛이 어두우시옵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숙자 의 아들 김종직 은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임지인 개령현 으로 내려와 개령향교 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 무심한 빗줄기를 보거라. 조금 전 감천제방 에 다녀왔는데 물이 넘어 급기야 제방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개령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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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연못 동부연당 에서 시작해 정원댁 과 유후조 묘소 , 내신정 , 개령향교 , 쌍샘 , 비석거리 , 팔승정 을 둘러본 후 개령 일대를 한눈에 조... 계림사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감문산 과 관학산 중간의 구릉지에 개령향교 가 나타난다. 개령향교 는 여러 차례의 이전과 중창 끝에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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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로 청 나라를 다녀왔으며,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랐다가 1872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퇴임하기까지 청백리(淸白吏)로서 명망을 얻었다. 한때, 관학산 에 있던 개령향교 터 를 탐낸 유 정승이 자신의 묘소를 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기도 했지만, 1989년 개령향교 대성전 을 중수할 때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 에 1866년(고종 3)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유 정승이 졸(卒)한 연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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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봉우리인 취적봉 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개를 돌리니 먼발치의 솔가지 사이로 언뜻 기와집이 스치는데, 취적봉 에서 관학산 으로 연결되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개령향교 와 계림사 다. 계림사 는 호랑이 형상의 감문산 지세 때문에 흉사가 자주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도화상 이 호랑이의 심장 자리에 지었다는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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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에서 선산 방면으로 지방도 59호선 을 따라가다 개령면 동부리 로 접어들어 개령초등학교 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들면, 개령향교 뒤편 감문산 자락에 규모는 작지만 직지사 와 함께 김천 제일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년 고찰 계림사(鷄林寺) 가 나타난다. 김천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계림사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