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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꾸며 머물던 정여립의 집터와 치마바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B020202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갑표

[평등 세상을 꿈꾸다]

동곡마을에는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마을 앞산인 제비산(帝妃山) 아래에는 정여립이 살았던 집터와 그가 천일기도를 올리며 수행했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조선 전기 사람인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다. 그에 관한 자료는 구술로만 무성하게 전할 뿐, 행적을 적은 기록은 불과 몇 줄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를 출간하면서 『지워진 이름 정여립』이라고 책 제목을 쓰기도 했다.

정여립의 출생지는 전주 남문 밖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 그는 한동안 제비산 아래에 살면서 금구원평 일대를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양반, 상놈, 농민, 노비, 스님 등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다.

그들은 실제로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고 전한다.

매달 보름날에는 함께 모여 무술 수련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눴다. 함께 하는 이들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저 멀리 황해도에서도 찾아왔다. 1587년에 정여립은 나라의 요청으로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남해안을 침범한 왜선 18척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제비산 중턱에 있는 월명암 뒤로 난 산 길을 따라 오르면 가파른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다.

정여립이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치마바위이다.

정여립은 이곳에서 3년간 천일기도를 올리고 대동사상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이곳을 찾아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듯 치마바위 곳곳에 촛농들이 녹아 있다.

정여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물어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 아마 모반을 했다지?” 하고 말끝을 흐리거나, “그 사람, 역적이었다지?”라고 말한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편에서는 모반자라고도 하고, 또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라 말한다. 선각자·사상가 또는 혁명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영국 공화정이 1649년에 처음 실시되었는데, 이는 정여립 사후 60년 뒤이다. 그래서 정여립을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조선조의 광주항쟁이라거나 혹은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사건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기축옥사 이후 당시 조정에서는 혈맥을 끊어 버린다고 정여립이 살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졌다고 하며, 그가 죽은 후엔 제비산에 그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집터는 현재 밭으로 변해 있으나 여기저기에 기와 조각과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된 시대에 정여립의 대동계와 그의 활동은 분명 반역의 조짐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세상은 천대받는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조선조 내내 흉악한 역적으로 지목되었고 아직도 각종 문헌에 역모를 꾀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정여립을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과연 정여립은 반역자였을까? 아니면 혁명을 꿈꾸던 이상주의자였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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