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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406
한자 夜學
영어의미역 Night Schoo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정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사회 교육.

[개설]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일제는 기존의 교육 제도를 공립화 하는 데 매진했고, 이로 인해 서당 등 향촌 자치적인 교육기관이 모두 철폐되면서 배우고자 하는 학생 수에 비해 학교 수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국 각 지역의 청년회가 야학 또는 강습소를 설치·운영하면서 이러한 부분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활동 내용]

고령 지역에서의 야학은 1920년 11월 고령청년회가 노동야학(勞動夜學)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동야학은 1920년 7월에 설립된 고령청년회의 주요 사업으로서 무료로 운영되어, 개학 이래 1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육의 혜택을 입었다. 노동야학에서는 조선어 및 한문, 일어, 산술 등을 가르쳤는데, 교사는 고령청년회 회원인 이상봉(李相鳳)·이정근(李正根)·유우식(兪佑植) 등과 당시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명덕(金明德)·노정용(盧靜容) 등이 맡았다. 1921년 10월 고령청년회에서는 노동야학 외에도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강습회는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아동 및 청년들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노동야학은 고령청년회관을 신축하면서 운영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1922년 9월 11일 고령청년회관 낙성식을 계기로 다시 문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노동야학이 활성화되자 고령청년회는 1925년 11월 무렵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자야학을 개설하였다. 여자야학에는 약 40여 명의 학생들이 가르침을 받았다.

노동야학과 여자야학 등이 모두 고령청년회에서 운영되면서 야학 활동은 고령청년회 활동의 성과에 따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926년 여름 고령청년회 회관이 수리에 들어가자 휴학을 실시했고, 회관 수리를 마친 뒤 100여 명의 학생으로 재차 운영되기도 하였다. 어찌됐든 이러한 고령청년회의 주도로 고령 지역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야학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령군의 야학은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 황국 신민화 정책 강행과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큰 타격을 입고 운영난에 봉착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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