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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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僑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중규 |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에 거주하는 중국인.
[개설]
화교는 대한 제국 말기부터 이주가 시작되었다. 화교(華僑)는 중화(中華)의 화(華)와 교거[객지 생활] 또는 교우[임시 거주]의 교(僑)가 합쳐진 약칭으로 일시적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교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98년 일본의 요코하마에 살던 중국 상인들이 자녀 교육을 위하여 학교를 세우고 학교명을 ‘화교 학교’라 칭한 데서 유래한다.
1. 군산의 화교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와 같이 군산의 화교도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언제부터 군산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임오군란으로 화교가 입국한 이후 1893년 청국 조정에서 자국 국민의 외국 여행 금지법을 폐지하며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한 많은 청국인들이 다른 지역보다는 빠른 시기에 군산에 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 이유는 1882년 당시 한·청간에 이루어진 수륙 무역 장정으로 청나라의 소규모 장사꾼들이 조선 땅을 휘젓고 다닐 때 군산 지역은 금강 수운의 중심지로서 호남 지역 세곡을 관리하는 조창이 운영되는 곳이었고 군산과 금강 수운(水運)으로 연결된 강경 시장이 조선의 3대 시장 중 한 곳으로서 조선 경제의 주요 거점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899년 군산항 개항 당시 개항의 당위성으로 서해안 일대의 중국인 밀무역을 단속하고 교역을 양성화할 필요성이 제기됨을 볼 때 중국 산둥성과의 거리가 인천 보다 가까운 군산 지역이 인근의 부안 줄포와 함께 일찍이 중국 무역상들의 밀무역 거래 지역이 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군산에 화교가 공식적인 거주를 시작한 것은 1899년 군산이 각국 조계 지역으로 개항장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군산과 관련된 화교의 기록을 살펴보면 1900년 『황성신문』 잡보에 실린 “인천항의 청국 영사 당영호가 군산과 목포의 영사를 겸임하고 있다”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00년이면 군산 개항 1년 후로 군산이 각국 조계 지역으로 개항장이 되자 인천과 원산에 거주하던 청국인들이 합법적인 치외 법권 지역인 군산 조계지에 거주하려고 이주하였고 이들 청국인들의 이해관계를 돕기 위하여 청국 영사관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청국인들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군산 각국 조계 지역 내의 문제를 협의하는 단체였던 거류지회에도 참석하지 않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조선을 조공을 바치던 신하의 나라로 생각하던 정치적 영향력은 이전에 비하여 약화된 상황이었다. 당시 청국인들의 이주에 대하여 화교들은 “한국에 오면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보다도 중국 사람을 우대하였고, 그 대신 한국 사람이 중국에 가면 중국인보다 우대하였으며 이러한 정책은 일본인들의 계략으로 보고 있지만 그 시절 중국 산둥성은 인구의 증가와 천재지변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려 조선에서 취업한 청년을 최고의 신랑감으로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군산에 이주하기 시작한 화교들의 주요 거주 지역과 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11년에 제작된 군산 각국 조계 지역 지주 현황 지도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지도에는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고 각국 조계지가 만들어진 후 조성된 조계지의 총면적 572,000㎡중 중국인 지주 4명이 35곳[주로 영화동 인근]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 식민지 시대 일본인 주요 거주지이며 상업의 중심지인 내항 인근 영화동 지역에 동순태 상회와 같은 무역 회사를 중심으로 화교들이 일찍부터 토지를 확보하고 일본 상인들과 경쟁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주 인구 측면에서도 1910년의 경우 군산의 청국인들은 일본인[3,000명 정도] 다음으로 두 번째 규모인 499명이 거주하여 한국인, 일본인, 청국인이라는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산에 이주한 화교가 정착기에 들어서는 기간 군산 화교의 위상은 한국에서 경제적 세력 확장을 꾀하는 1920년대 초와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조선인과의 갈등을 겪게 되는 1920년대 후반기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경제적 확장 시기를 보면 1924년 인천 주재 중국 영사의 인정으로 인천 상무 분회를 군산에 설치하여 명실 공히 서울, 인천, 평양, 신의주, 원산, 진남포, 부산과 함께 화교 상인 단체인 중화 상회를 운영하게 된 군산 화교의 경쟁력은 성장 일로에 있었다.
2. 군산 화교의 생활
군산 지역 중국인은 대부분 산둥성의 내항, 용성, 영동 지역 등 주로 바닷가 인근 출신으로 주요 직업은 도시나 읍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포목, 요식업, 잡화]과 도시 주변에서 야채를 재배하여 판매하는 농민 및 노동자들이었다. 주요 거주지는 포목 상인 중에 도매상은 영화동[당시 전주통] 인근에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규모 도매상인 금생동과 우풍덕이 그 곳에 있었고 대규모 요리집인 동해루, 평화원, 태화루, 쌍설루 등이 현 전북 은행 거리 인근과 시내 중심지에 있었으며 소규모 포목점은 현재의 영동 골목에서 조선의 개성 상인 포목점들과 경쟁을 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의 광복은 군산 지역 화교들에게 생활의 큰 변화를 주었다. 농업 화교의 경우 주요 소비 계층인 일본인의 귀향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중국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향하기 시작하였는데 해방 당시 1,200명 정도였던 군산의 화교들 중에서 절반 가량인 600여 명이 귀국을 선택했다. 이처럼 1890년대 이후 군산에 이주하기 시작한 화교들은 한때 1,200여 명 이상이 거주하였으나 해방과 함께 본국으로 귀국하고 1970년 이후 국외로 재이주하거나 사망하여 현재는 40여 명만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