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향교-기우만 의병부대 주모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094
한자 光州鄕校-奇宇萬義兵部隊主謀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터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재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398년 - 광주향교 건립
건립 시기/일시 1488년 - 광주향교 이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11월 1일 - 광주향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 광주향교 소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0년 - 광주향교 중건
소재지 광주향교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지도보기
성격 향교|교육시설
소유자 광주향교
관리자 광주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있는 조선시대 교육기관.

[변천]

향교(鄕校)는 조선 전기 지역 교육의 강화와 성리학적 질서의 보급을 위해 설치한 관학 기구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각 도의 안찰사(按察使) 들에게 향교의 흥폐를 통해 지방관의 고과를 삼을 것이며, 교학(敎學) 의 쇄신을 주문하였다. 이에 따라 부, 목, 군, 현의 각 고을에 하나씩의 향교를 세웠고, 그에 따라 광주에도 광주향교가 세워졌다.

광주향교(光州鄕校)는 1398년(태조 7) 서석산(瑞石山)[무등산] 장원봉(壯元峰) 아래에 처음 창건되었다. 그러나 호환이 잦아 동문 안으로 잠시 옮겨 세웠다가, 1488년(성종 19) 수해로 인해 지금의 위치인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일대로 옮겨 세웠다. 그러나 당시의 건물들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불타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그 뒤 1600년(선조 33)에 중건한 것이다.

조선의 건국 이후 500년 넘게 독점적인 지방 교육기관의 지위를 지녔던 향교는 서원의 등장, 개항 및 신학문 도입과 함께 점차 그 역할이 퇴색되어 갔다. 1894년(고종 31) 시행된 일련의 개혁 정책에 의해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의 기능은 성현에 대한 향사(享祀)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향교는 여전히 지역 유림들의 공적인 모임과 뜻을 모으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위치]

광주도시철도1호선 금남로4가역에서 1번 혹은 2번 출구로 나와 중앙대교 방향으로 나가서 중앙대교를 건너가면 있다.

[현황]

현재 광주향교는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을 갖추고 문회재(文會齋), 양사재(養士齋), 유림회관(儒林會館), 충효교육관(忠孝敎育館) 등의 부속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설립 이후로 성현에 대한 향사를 끊이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각급 학교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학 및 한학 교육 등이 진행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향교는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그 해 12월 30일 단발령이 내려지자 각지의 유림들이 일본과 김홍집 내각에 대한 저항에 나서게 되었다. 이런 흐름에서 전라남도 광주 지역도 비켜가지 않았다.

1896년(고종 33) 2월 제천의진(堤川義陣)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광주에 도착하자, 기우만(奇宇萬)을 비롯한 지역 유림들은 광주향교를 본진으로 삼아 광주, 나주, 장성 지역 의병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광주향교에 모인 의병 지도자들에 의해 기우만은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陳)의 총수가 되었다. 이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참여를 독려하고 광주목(光州牧)의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기의하였고 한양으로의 진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 해산의 명령을 받은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부대를 해산하였다. 비록 호남창의진의 상경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광주향교를 비롯 호남 유림들이 건재함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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