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4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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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老衡洞-遺物-遺積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
집필자 | 김동윤 |
향사(鄕舍)
원노형에 도가집이라 해서 원래 구한말까지 노형향사가 있었다. 지금의 송홍도 댁 서쪽에 68평 대지에 30여 평 규모의 초가집을 지어 향장이 집무하면서 노형의 제반 업무를 수행했었으나, 4·3사건 때 불타 버리고, 대지는 1962년 시유지화되어 토지 구획 정리 사업시 노형인들이 소유권을 갖지 못하고 제주시청에 매각하였다.
성지(城址)
원노형마을 북쪽 참남밭과 고노골밭(지금의 신제주관광호텔 부지)을 경계로 하여 동서 100여 미터, 높이 4미터 정도의 겹겹으로 축조된 성이 있었는데 이를 고노골성이라 한다. 언제 이 성이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단지 축조 연유만 전해져 오고 있다. 즉, 원노형 북쪽으로 사각(흉한 형상)이 비춰 있기 때문에 마을에 흉사가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민들이 축조하였다. 성 북쪽 밭의 5~6군데에 몇 아름드리로 자란 팽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졌었다. 또한 요소요소에는 참나무(도토리나무)도 심어져 있었는데 4·3사건으로 팽나무와 참나무는 베어지고 성은 신제주 개발로 없어지고 말았다.
1949년도에 정존마을에 성을 쌓아 집단부락(건설부락) 생활을 하다가 1954년경에 월랑에도 성을 쌓고 이주하였다. 그 이후 4·3사건이 평정되고 살림이 나아지자 큰 집들이 들어서게 되고 이 곳의 성담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집 축담, 울담, 밭담 등으로 사용해 버려서 지금은 몇 개 마을을 제외하고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정존의 재건부락 성지(노형성)는, 1949년 정월에 도두리 소문진(월산 출신) 씨가 살고 있는 집으로 노형 각 마을 대표들이 집결하여 협의하면서 노형에 대한 마을 재건 사업은 구체화되었다. 이 곳에는 소문진을 비롯하여 각 마을 대표들이 모였다.
월랑의 김용창·김용국·현태수, 정존의 문태효·양항연, 함박이굴의 강명표, 광평의 김창옥·현명환·현용필, 월산의 소문진·문무겸·양성숙 등이 마을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때 노형재건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에서 강명표(노형리장), 양성수(건설부장), 현용필·현태수(서기), 김용창(총무), 양항연(재무) 등을 선출하고 마을 재건에 들어갔다. 약 2개월 반 동안 성을 쌓았다. 제주주정공장 창고 등에서 수용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나온 귀순자들은 당장 집이 없어 천막생활을 하면서 각 지역으로 피신했던 각 마을 주민들과 함께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먹을 양식이 없어 들나물(쑥, 달래, 냉이 등)에 밀채(밀기을)를 섞어 먹으면서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밀채를 살 돈마저 없어 하루 한 끼 죽물로 살아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성을 쌓고 10여 평 정도씩 땅을 나누어 움막을 짓고 정존에서 6년간의 건설부락 생활을 해야만 했다. 노형인으로서 이 분들의 삶의 굳은 의지가 오늘의 노형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초토화된 폐허의 터전에 내습에 대비하여 성을 쌓게 되었는데, 폭 2m, 높이 2.5m 정도로 불탄 터의 울담을 이용해 등짐으로 지어다가 잣담(성담을 쌓는 방식)을 쌓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보호 수단으로 모자라 성담에 바싹 붙여 폭 1.8m 깊이 1.8m 정도의 도랑을 파고 그 밖으로 가시나무를 잘라다 철조망처럼 둘러쳤다. 노동 기구조차 불에 타 버린 시절이었기에 매우 힘든 노동이었다. 할당제였기 때문에 그 흔한 가시나무조차 서로 다투면서 잘라 올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노형초등학교 동쪽 울타리에서 강대규 댁 북쪽을 지나 수덕동산 동남쪽 20m 지점에서 양영종 댁 동쪽을 거치는 동서 약 220m, 남북 약 210m의 정존성담이 이루어졌다.
광평인 경우는 1956년정존 건설부락 생활을 마치면서 성쌓기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현용환 댁 서북쪽(북문)→남쪽 양필성 댁 울타리 서쪽→이부휴 댁 울타리→동남쪽 김성남 댁 북쪽 울담→막소왓도(서남문)→현만형 댁 동편 동산거리(동문)→소독동산 북쪽→현창선 댁 북쪽 울타리를 에우고 서북문을 향하는 광평성담이 완성되었다. 월산의 경우는 주변의 돌덩이를 이용해 폭은 아래 2m, 위 50㎝, 높이는 두 길, 길이는 350m 정도로 타원형 형태의 성담을 쌓았다. 위치는 한길[지금의 서부산업도로]에서 북쪽인 알동네 중심으로 축성했다. 즉 마을 안길을 기준으로, 김태영 집터 동서쪽 60m를 중심으로 해서, 김희용 숨굴왓 서녘밭을 거쳐, 방애 서쪽 60m, 김희용 집터 서북쪽을 가로질러 남북 150m, 출장소 밭을 경계선으로 남쪽 홍은표 집을 통과하는 월산성담이 완성되었다.
마을 제단
월랑인 경우 정해진 제단은 없었고, 큰앞밭, 밍숭이왓, 꿩대기왓, 모살밭(못서알밭), 웃밭, 관전밭 중 1곳을 택하여 제단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나머지 마을들도 정해진 곳은 없다. 근래에는 대체로 마을회관 내에 건설하고 봉향하고 있다.
방애(연자마 硏子磨)
래,가래라고도 칭해진다. 방애가 본래 있었던 자리는 그 자취를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가래돌도 더러는 휴식 공간으로 옮겨져 쉼터로 놓여져 있는 것도 있지만 고물 수집상들에게 팔려나간 것이 더욱 많고 일부는 구석에 버려져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송덕비
월랑인 경우, 원래 남동산(참나무가 있었음)에 월곡 선생 송덕비가 있었는데 4·3사건으로 파손되었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해도 본인 및 후손들이 사양한 관계로 송덕비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월랑은 송덕비가 세워진 곳이 없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수도·전기·마을길 포장 때 성금한 분들의 송덕비들이 남아 있다.
고서적·골동품
4·3사건으로 마을 가옥들이 전소되는 바람에 종이로 만들어진 서적과 나무로 만든 남방애, 도고리, 남박, 물레, 베틀, 곰배, 따비, 도리깨, 섬피, 망태, 푸는체, 되악새기, 좀팍, 남죽, 국자, 곰박(떡 거리는 것), 안반, 홍지대, 서답개, 덩드렁막개, 물막개 등 고가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돌로 된 래, 풀래 등은 더러 남아 있다. 그것마저도 골동품 상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거의 팔려 나간 실정이다. 고서적인 경우 4·3사건 이후 김철지 조부를 중심으로 고서적을 수집 돌려가며 읽다가 지금은 현채영 집에 90여 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의복
입는 것으로는 무명으로 만든 홑바지 저고리, 겹바지 저고리, 고장중이, 갈중이적삼, 소중기, 삼베로 만든 중이적삼, 두루막이, 무명천에 솜을 넣어 만든 솜바지저고리, 후루메, 도폭(제사를 지낼 때만 입음), 청금, 베로 만든 상복, 제복, 결혼할 때 입고 쓰는 사모관대, 다리에 치는 것으로 행경, 머리에 쓰는 것으로는 맹건, 갓, 패랭이, 탕건, 삿갓, 입저, 관, 벙것, 유건, 방닙(상 날 때만 씀), 새패리(상 날 때만 씀), 두건(상 날 때만 씀), 건대(상 날 때만 씀) 등이 있으며, 신는 것으로는 버선, 신발로는 초신, 남신(남신-나무신), 가죽신, 창신(신발 창에 쇠를 박은 신)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