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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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陽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설립 시기/일시 | 1927년 8월 11일 - 밀양소년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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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28년 11월경 - 밀양소년회 해체 |
최초 설립지 | 밀양청년회관 - 경상남도 밀양군 삼문동 219 |
현 소재지 | 밀양청년회관 터 -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 219 |
성격 | 사회단체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활동한 소년 단체.
[개설]
밀양소년회는 일제강점기 밀양에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소년운동 단체이다.
[설립 목적]
밀양소년회는 1927년 8월 11일 밀양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소년운동은 민족운동의 한 부분으로, 1920년대 전국적으로 500여 개 이상의 소년운동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년운동은 청년운동과 함께 당시 중요한 사회운동의 하나였는데, 재래의 유교적 윤리나 도덕이 낳은 폐습으로부터 어린이를 해방하고 인격적으로 예우하려는 소년해방, 소년보호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한 식민지 노예교육으로부터 조선의 소년·소녀들을 해방시켜 자유로운 인격체로 교육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밀양의 소년운동 조직으로는 영광운동단(永光運動團), 밀양소년무적단(密陽少年無敵團), 밀양소년단, 밀양소년군 등이 있었다. 1920년대 후반 밀양의 유지들은 기존의 소년운동 단체들이 ‘모두 완전하지 못하다’고 유감을 표하며 새로운 단체의 창립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에 밀양소년단과 밀양소년군은 통합하여 밀양소년회를 창립하였다. 창립 당일 밤 개최한 위안음악회에는 4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변천]
창립 직후 밀양소년회는 밀양청년회의 산하 단체로 활동하다가 1927년 독립된 조직체로 벗어났다. 1928년 11월 밀양소년회 집행위원장이었던 김종태(金鍾泰) 등 밀양소년회와 밀양청년동맹 등의 몇몇 인사들이 불온한 서적을 돌려보았다는 혐의로 검거된 이른바 ‘밀양문예동인사(密陽文藝同人社) 사건’이 일어났다. ‘밀양문예동인사 사건’으로 밀양소년회 주요 인사들이 체포된 가운데 밀양소년회는 밀양소년동맹으로 조직을 변경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밀양소년회는 아동서화전람회나 동화대회, 소년문예전람회 등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였고, 소년 잡지인 『소년계』의 밀양지사를 설치하였으며, 조선소년연합회에도 가입하였다. 1927년 11월 밀양청년회에서 벗어나 독립된 조직체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기관지로 『활살』 발행을 준비하였고, 조선소년총연맹 경상남도소년총연맹 창립대회를 주도하였다. 1928년 7월 도총연맹 설립대회가 밀양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도총연맹의 위치가 밀양으로 결정되었고, 도총연맹의 중앙집행위원장도 밀양소년회 집행위원장이었던 김종태가 맡았다.
[의의와 평가]
밀양소년회는 일제강점기 밀양의 대표적인 소년운동 단체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밀양이 일제하 경남 지역 소년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