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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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校洞의 名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
집필자 | 이민우 |
문화 유산
향교동에 위치한 주요 문화재로는 만인의총(사적 272호)을 비롯하여 남원향교(지방유형문화재 49호), 남원향교 대성전(지방유형문화재 8호), 경주 김씨 보판각(지방유형문화재 161호), 교룡산성(지방기념물 9호) 그리고 남원 사직단(지방기념물 79호) 등이 있다. 교룡산성 안에는 685년에 창건한 선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는 대북(민속자료 5호), 대웅전(지방유형문화재 114호), 교룡산성 승장동인(민속자료 27호) 등이 있다. 대북은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대웅전은 685년에 창건되었다. 교룡산성 승장동인(僧將銅印)은 승병장 처영(處英)이 성을 수축하고 전란에 대비하여 조정에서 산성별장의 병부로써 이 동인을 새겨 보냈다고 한다.
만인의총(萬人義塚)
사적 제 272호인 만인의총[사적 272호]은 춘향고개를 넘어 남원 시가지로 접어드는 길목인 향교동 왕산 남쪽 기슭에 정유재란 때의 호국선현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맞아 남원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민·관·군을 합장한 무덤이다. 정문을 들어가 오른쪽의 기념관에는 정유재란 때, 왜군 56,000명과 혈전분투하는 전황 기록화가 나라 사랑의 길로 인도하고, 당시 민관군이 사용했던 유품은 역사를 재조명케 한다. 정문 왼쪽은 관리 사무실이고, 정면 층계를 오르면 만여 명의 순국영령이 잠든 만인의총이 있다. 빈틈없이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자연스레 배치된 각종 나무들이 정연하기만 하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이름 없이 순절한 군관민 1만여 의사들이 잠든 곳,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으로 손색이 없다.
임진왜란 때 육전을 택하지 않고 수전을 택해 패배했다고 판단한 왜적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 적의 우군 54,000여 명은 진주성을, 좌군 56,000명은 남원성을 공략했다. 한편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했다.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했으며 13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는 혈전분투하다가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이 때 남방 최대의 도시로서 만호(萬戶)에 달하였던 남원의 건물은 17채만 남고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에 충렬사를 건립, 8충신의 위패를 봉안했다. 아울러 만인의총도 충렬사와 함께 용성관 경내(구 남원역 서편)에 있었다. 1867년 구 남원역 뒤 동충리로 이전한 뒤 1879년 사우(祠宇)가 철폐되었다. 1963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 곳에 들러 만인의총을 이장 성역화를 지시, 1964년 향교리로 옮겨져 사적 제 27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곳의 정화 사업은 1977년부터 호국선현 유적 정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어 정부의 지원과 도민의 정성어린 헌수로 3만여 평의 부지에 2만여 평의 영역 조경 및 건축 사업과 1만여 평의 주차장 시설을 갖춰 1979년 완공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정유년 음력 8월 16일에 해당)에 제향을 모시고 있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는 역사의 현장이다.
남원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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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인 남원향교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전국 향교 설치령에 따라 태종 10년(1410년)에 세워진 것으로 처음에는 남원부의 서쪽에 세워졌다. 그러나 매년 석전제를 드릴 때마다 호랑이의 훼방이 심해 세종 10년(1428) 요천 위 현 덕음암(德蔭庵) 자리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그 뒤 남원향교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세종 25년(1443)의 일이며,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으나 2년 뒤에 대성전을 복원하였다. 광해군 원년(1609)에 명륜당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0여 년이 지나 영조 24년(1748)에 동재와 서재를 중건하였다. 그런데 사마제는 순조 29년(1829)에야 재건되었으며, 불행히도 명륜당이 고종 13년(1876)에 화재로 소실하였다. 그러나 그 때 바로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 시설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신문, 동재, 서재, 명륜당, 고직사, 진강루, 외문 등이 현존한다.
남원향교 학생 정원은 70명이었다 하며, 1808년 과거 제도의 변경으로 남원 군수의 관할로 되어 모든 행정적인 일들이 군수 직속으로 이관되었다. 그 뒤 왜정 때에는 향교의 관리권이 일본 사람들에게 넘어간 적도 있었다. 해방 후 유림들이 서둘러 퇴락한 향교를 크게 수리하였다. 일제 때 이 지역 유림들은 위성 조합을 조직하여 향교의 유지 관리에 힘쓰기도 하였다. 문루에 진강루(振綱樓)란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삼강오륜을 떨친다는 뜻이다.
남원향교에 관한 인터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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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사무국장
남원향교 사무국장(노규열) 등과 남원향교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원향교에는 현재 유림 대표들은 195명이 있다. 매년 장의를 모집하는데, 현재 남원향교에는 53명의 장의들이 있다. 향교는 교육 기관의 역할도 하므로 장의들을 매년 모집하여 교육을 시킨다. 그러니까 매년 약 27명씩의 장의들을 모집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근교 다른 향교에 비해 상당히 많은 수이다. 장의들의 입학 자격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고 각 읍면동에 있는 현 유림들의 추천을 받아 2년간 교육을 시킨다.
장의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는 게 유림들이다. 그런데 현재 남원향교에는 유림 대표들이 195명이 있다. 유림 다섯 명 정도 중에서 한 사람을 대표로 선발하고 아무리 많아도 다섯 명을 초과할 수 없다. 그러니까 현재 남원향교에 유림 대표들이 195명이 있으니까 남원향교에 유림들이 약 1,000명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장의가 되고, 그 다음에 유림이 되고 유림들이 대표들을 선정을 하게 된다.
장의들이 하는 일은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에서 공자에게 일 년에 두 차례 즉, 춘추(음력 2월과 8월 上丁日; 이를 각각 2월 초정, 8월 초정이라고 함)로 제사를 지내고 매월 초하루 분향을 한다. 장의들이 하는 행사는 이것뿐이고 더 이상 특별한 행사는 없다. 그리고 장의들을 별도로 교육시키거나 하는 규정은 없으나, 남원향교에서는 장의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남원향교 교지」가 있다. 여기에는 남원향교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향교 앞에 있는 비석들의 비석문까지 해석해서 다 들어 있다. 이것이면 2년 동안 장의들을 교육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이외에 장의들이 따로 교육 받는 것은 없다.
최근에 남원향교는 예전보다는 좋아진 편이다. 많이 활성화되었다. 예를 들면, 2004년도에 남원향교가 문공부에서 전국 시범 향교가 되었다. 지원금도 받아 복사기, 컴퓨터 등을 새로 구입하여 기기들이 상당히 현대화되었다. 또한 성년회나 기로연 등의 행사도 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 3-4년째 계속 행사를 하고 있다.
성년회는 만 19세 이상 남원 시민을 대상으로 각 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서 남성, 여성 각각 40명씩 80명을 선정해서 원래 5월 3번째 주 월요일에 행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남원향교에서는 일요일에 행사를 하고 있다. 어른으로서의 예를 갖춰주는 행사로 광한루원에서 한다. 성년회는 사례 즉, 관례(冠禮 즉, 성년회),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중 하나에 속하는 중요한 예이다.
기로연(耆老宴)은 주로 85세 이상 어른들을 대상으로 술도 한잔 권해 드리고, 시도 낭송해 드리고, 춤도 추면서 하루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광한루원에서 해서 연을 베푼다. 옛날에 기로연은 임금이 연세가 많으신 분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푼 것인데, 이를 기화로 해서 남원향교에서 여러 해 동안 해오고 있다. 이밖에 회혼례(回婚禮) 등의 행사도 하고,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문도 가르치고 있다.
남원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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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대성전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인 남원향교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왕조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나라에서 각 지방에 향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그 안에 대성전을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다. 남원향교는 조선 태종 때 성안 서쪽 골짜기에 처음 세웠다가 얼마 후 요천 건너편으로 옮겼는데, 요천이 범람할 때마다 학생들이 통학하기 어려워 세종 25년(1443)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사했다고 전한다. 그 후 정유재란 때 향교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선조 32년(1599)에 지방의 유지 유인옥(柳仁沃)이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과 유학자를 모셨으며, 매년 봄가을을 맞아 이곳에서 석전대제라는 큰 제사를 지낸다.
선국사 대웅전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인 이 건물은 교룡산성(지방기념물 9호)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처음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받침부는 비교적 낮고,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는 반듯한 기둥을 썼다. 정면의 처마 밑 벽체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대웅전 안에는 지방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된 큰 북과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승병대장의 인장(印章)이 있어, 이곳이 임진왜란 때 승병의 주둔지였음을 알려준다.
경주김씨 보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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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보판각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제161호인 이 나무 판각은 경주 김씨 수은공파(樹隱公派)의 족보를 펴내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판각의 크기는 대체로 28㎝×60㎝이다. 1711년에 발간한 신묘보(辛卯譜)의 판각을 비롯하여 여러 후속편 족보의 판각 등 모두 314판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후속편 족보는 처음 발간한 족보와 마찬가지로 시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보를 밝힌다. 하지만 수은공파의 후속편 족보는 맨 처음 발간한 신묘보 이후에 출생한 후손만을 기록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였다. 수은공파의 시조인 수은공은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으며, 후에 남원으로 낙향하였다.
남원 교룡산성
전북 지방기념물 제9호인 돌로 쌓은 교룡산성)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3.1㎞ 가량에 이른다. 산 중턱에 성벽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으며, 동쪽에 계곡이 있어 그곳에 반월 출입문을 두었다. 성을 처음 쌓은 내력은 분명치 않으나, 그 터와 형식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 처영(處英)이 고쳐 쌓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밀덕봉과 봉덕봉 등 산세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인근 주민이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다.
남원 사직단
전북 지방기념물 제79호인 남원 사직단은 토지신인 '사'와 곡식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농경국가에서 토지와 곡식은 나라 살림의 근본이기에 사직은 곧 국가의 수호신을 뜻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1394) 서울에 사직단을 세우자 전국 각지의 행정 중심지에도 사직단을 세웠다. 남원 사직단은 역시 그 무렵에 설치했다고 하는데, 중앙에는 네모나게 돌로 쌓은 그것이다. 해마다 정월이면 남원 부사가 몸소 이곳에 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그 해의 풍년과 고장의 평안을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