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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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김종한 할아버지의 사람 關係 이야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
집필자 | 이민우 |
공식 조직
김종한 할아버지는 농업기술자협회, 원지도자연합회, 시노인회, 향교 등등에 참여해서 대한민국 안 가본 데가 거의 없다. 또한 중국, 일본 등 해외에도 자주 다녀왔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동아일보에서 독립 유공자들을 초청하여 중국의 독립투사들의 투쟁 장소에 현지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의 고숙이 독립투사셨기에 여기에 참여한 적도 있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나는 각 기관 혹은 부서에 한창 때는 20여 개가 되었다. 그래서 거의 날마다 회의 때문에 외출을 했어요. 그 당시 우리 집은 60여 마지기의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머슴들과 20여 명의 인부들을 부려야 하는데 집안일은 거의 하지 못했지요. 그러니까 가족들은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공적인 일만 보고 다닌다고 불평이 많았지요."
친구 관계
김종한 할아버지의 친구들은 많이 있었는데 많이 죽고, 아파서 병원에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도 출입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어이 우리가 너무 오래 살아서 큰 일 났네. 그리고 남자들이 여자보다 먼저 죽어야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는데.” 라고 가끔 말하고 있다.
“나는 한번 집을 나가면 이틀, 사흘이 되어도 전화도 하지 않았지요. 어떤 때는 닷새가 지나도 집에 들어가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안사람은 이미 그러려니 하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안사람에게 얘기를 하면 오히려 기분만 나빠지기 때문에 얘기조차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우리 집은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한참 농사철에는 20여 명의 샛밥을 내다 줘야 했어요. 해서 남자 주인이 있어야 하는데 남자 주인이 없어서 안사람이 힘들었을 거예요.”
“또 여자들이 임신을 하면 뭐가 먹고 싶은 것이 있었을 텐데 나한테 차마 얘기도 못할 뿐더러 나도 잘 몰라서 사다준 것이 없었어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안사람을 데리고 나가서 밥 한 그릇 사준 적이 없고 같이 여행 한번 간 적이 없었지요. 그래서 안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계를 한다든지 혹은 무엇을 하여서라도 여행도 시켜주고 외식도 하고 그러는데, 왜 당신은 나를 데려다 놓고 이렇게 복잡하게 살게 하느냐'고 말하곤 해요.”
노래 / 놀이
주로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등의 몇몇 우리나라 노래를 제외하면 거의 시나노유로 등과 같은 일본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