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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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傳統-現代-樂安邑城 |
영어공식명칭 | Tradition and Modernity coexistence - Naganeupseong Folk Village |
영어음역 | Tradition and Modernity coexistence - Naganeupseong Folk Village |
영어공식명칭 | Tradition and Modernity coexistence - Naganeupseong Folk Village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태홍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국가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만들어진 읍성.
[개설]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곽시설로 읍성의 형태는 고려시대 말기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읍성의 설치는 조선 초기에 시행된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서 읍성의 기능이 상실되고 성곽이 폐기된다. 또한, 전란과 근대 개발로 인하여 성곽은 대부분 훼손된다. 그러나 낙안읍성은 그 훼손 상태가 다른 지역의 읍성에 비하여 적었으며, 복원사업을 통하여 당시 읍성의 구조적인 측면과 더불어 생활상까지 복원되었다.
[낙안읍성의 역사적 배경]
삼국시대의 낙안은 백제 후기 방-군-성의 체제 하에서 분차군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까지 지방 행정조직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후 낙안이 오늘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인데 낙안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낙안은 왜구의 피해를 많이 보게 된다. 기록에는 3회의 침탈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남해안 일대에 전반적으로 약 70년간에 걸쳐 극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 인하여 해안가에 있는 지역은 치소를 옮기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고려 후기에 축조된 29개소의 읍성 중 다른 도에 설치된 6개소의 읍성을 제외한 나머지 23개소는 왜구가 가장 가까운 상륙지점인 경상도 연해에 축성되고 있어, 연해읍성의 축조 목적이 왜구의 방어에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현재의 위치로 낙안의 치소를 옮겨 토성을 축조하게 된다. 이후 토성을 석축성으로 개축하고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개축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1424년(세종 6) 이후로 보고 있다. 객사는 1450년(세종 32)에 증축되었다. 조선 시기 낙안군은 오늘의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와 별량면 일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기록에 따르면 306호, 1,439명의 호구에 경작지는 2,016결이며, 논이 그 3/5에 미달하였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반[『여지도서』]에는 2,653호, 8,069명의 호구에 논 1,684결, 밭 595결로 증가하게 되었다.
[낙안읍성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삼국시대의 낙안은 백제 후기 방-군-성의 체제 하에서 분차군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 낙안읍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져 있는 분지의 평탄한 곳에 있어 치소로서의 기능 면에서 볼 때 아주 적합한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형적으로 낙안읍성은 완전한 평지성 유형에 속하며 형태 유형은 긴 사각형에 속한다. 성곽의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자리하고 있으며, 배후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남해안의 여자만에서 안쪽으로 약 8km 정도 들어와 있는 분지형의 평야 지대이며, 주변으로는 금전산, 오봉산, 재석산, 부용산, 백이산 등이 둘러있다. 이러한 입지는 치소로서의 기능 면에서 볼 때 적합하다고 볼 수 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장기농성을 하기에는 불리하다.
낙안면은 조선시대 낙안군 지역으로 1908년 순천군에 편입되었고, 1949년 승주군에 소속되었다가 1995년 순천시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지방통치제도는 기본적으로 고려 시기의 것을 계승 보완하는 수준에서 정비되었다. 15세기 초 태종 대에 그 대체적인 윤곽이 확립되고 세종 대까지 일부 수정을 거쳐 마련된 것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조선 시기의 지방통치체제였다. 따라서 조선 시기의 낙안군 역시 고려 시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은 물론인데, 주군현(主郡縣)으로 승격된 고려 후기의 읍락이 조선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현재 낙안면은 행정구역상 북으로 순천시 승주읍, 동으로 순천시 상사면과 별량면, 남으로 보성군, 서쪽으로 순천시 송광면과 외서면에 접하고 있어 순천시 내의 남서쪽에 있다. 지형적으로 낙안면은 해발 668m의 금전산을 진산으로 삼고 있으며, 강은 낙안천과 교촌천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석흥천과 상사천이 동으로 흘러 이사천과 만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오늘날 민속 마을로 지정된 낙안읍성은 금전산 남쪽의 완만한 평지에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어서, 옛 읍성의 동로체계와 마을의 공간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읍성 내에는 많은 건축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건축학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낙안읍성의 과거와 현재구조]
낙안읍성은 198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1984년부터 지속해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복원 전 성벽은 동문 주변을 비롯하여 몇 곳만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특히 6.25전쟁 후에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1451년의 기록에 의하면 읍성은 둘레가 2,865척, 성의 높이가 평지는 9척, 높은 지대는 8척 5촌, 여장의 높이가 2척 5촌, 적대 12개소 내에 아직 쌓지 않은 곳이 8개소, 문이 3개소, 여장이 420, 성 내부는 우물이 2개소, 작은 못이 2개소이다. 그리고 이후 성문은 18세기 중엽 이후 2개소로 축소된다.
성곽의 유형은 지형적으로 평지성에 속하며,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구조로 성문은 3개소가 설치되었다. 성벽 길이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세종실록』에 2천 8백 65척, 높이는 9척에서 8척 5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592척, 높이 8척, 『여지도서』에는 둘레 1,590척, 높이 8척으로 기록되어있다. 현재 복원된 성벽은 1,468m, 내벽 쪽은 1,351m이다. 성벽의 너비는 구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는데, 대체로 동쪽 하부 너비 430㎝, 상부 너비 350㎝, 서쪽 하부 너비 590㎝, 상부 너비 510㎝, 남쪽 하부 너비 420㎝, 상부 너비 390㎝, 북쪽 하부 너비 560㎝, 상부 너비 490㎝ 등으로 나타났다. 성벽의 높이는 3~5m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성벽은 구간에 걸쳐서 내외벽을 모두 석축한 협축식으로 축조되었다. 전체적으로 성벽은 거의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일부 구간에 넓고 얇은 평평석과 같은 것으로 기단석을 삼고 있다. 이 기단석 위쪽의 안쪽으로 15㎝ 내외 들어가서 성돌을 쌓았다. 미석은 성벽 전체에 걸쳐 외벽에만 설치되었다.
낙안읍성은 내부는 도로 구성이 ‘T’자 모양이며, 동서로 남문로가 만나는 지점에 시장이 형성되고, 그 중심부 위로 객관과 관아가 위치하여 일반적인 읍성 계획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구조이다. 민속 마을은 마을 주민들이 실제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근래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부터 민속 마을 곳곳에 주점이나 음식점 등이 들어섰지만, 본래부터 있던 장터의 점포들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이들 상점의 운영도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마을 공동체에서 번갈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는 물론 민속신앙인 당산제가 예전과 다름없이 행해지고 있다. 민가의 구조 역시 호남지방의 전통적인 주거 형태와 생활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낙안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내아가 기와집으로 복원되었으며, 민가들은 모두 작은 초가집들이다. 초가집은 대부분 ‘一’자형 삼칸집이며, 이 가운데 9개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체성(體城)의 길이는 낙안읍성의 안내도에 1,410m로 나타나 있다. 동문이 있는 동쪽의 성벽 하단에 기단석이 보이고 남문이 있는 남쪽의 성벽 하단에서는 기단석이 보이지 않는다. 동쪽의 성벽 현상은 성벽보다 훨씬 얇은 기단석을 밑에 놓고 기단 위쪽 14㎝ 정도 들어와서 성벽의 가장 아래 돌을 놓았다. 성문의 주변 즉 육축(陸築)[체성과 연결하여 성문을 내는 곳에 일반 성벽보다 두텁고 높게 쌓은 것을 말하며, 일반 성벽보다 큰 돌을 사용하여 축조] 한 부분과 옹성은 큰 돌을 이용하여 다른 성벽보다 더 튼튼히 축성하였고 네모막돌 바른층쌓기 수법을 하였다. 성돌을 잘 다듬지 않아 성돌 사이에 틈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작은 쐐기돌을 많이 끼우고 있어 조선시대 전반기에 축성한 읍성류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미석(尾石)은 체성과 여장 사이에 약간 튀어나오게 한 것을 말하는데, 외벽에는 전체적으로 미석을 복원하였고 내벽 쪽에는 없다. 동문과 남문 주변의 일부 구간과 이들 문에 설치된 옹성에 여장이 복원되어 있다. 석성(石城)인 낙안읍성은 조선 초기에 쌓은 석성임에도 불구하고 성문 주변뿐만 아니라 전 구간에 걸쳐서 내·외벽을 모두 구축한 협축식 기법으로 축조되었다. 이러한 협축식 축성법은 백제의 순천 검단산성, 여수 고락산성, 고흥 독치성, 구례 합미산성 등에 잘 나타난 바와 같이 고대산성에서부터 볼 수 있지만 크게 유행을 하지 못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한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체성의 축조는 장대석과 같은 얇고 긴 기단석을 아래에 두고 그 위로 약 15cm 정도 들어와서 성들을 올려놓고 있다. 이처럼 기단석을 두는 기법은 조선시대 읍성의 축조기법 가운데 한 특징이기도 하다. 성돌은 아랫돌이 크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며 틈 사이에 쐐기돌이 많고, 성문 주변의 육축 부분이나 옹성의 성돌은 다른 체성 구간보다 더 큰 석재를 이용하여 튼튼하게 쌓았다.
성문과 옹성은 기록에 의하면 처음부터 3개소가 있다가 18세기 이후 어느 시기에 1개소가 폐쇄되고 남북의 문루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은 동서남문이 복원되어 있으며, 동문과 남문에는 문루까지 복원되어 있다. 동문은 읍성의 남쪽 부분에 위치하며, 읍성 출입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다. 서문은 문루가 없이 개구부와 육축 부분만 복원되어 있다. 개구부의 너비는 9.5m이고 두께는 9.5m이다. 문지의 서쪽에 잇대어서 내측 길이 8.5m, 너비 4.5m의 방형 옹성이 있다. 남문은 동문과 같은 형식을 이루고 있는데, 밖으로 평지가 펼쳐져 농경지로 통하는 길이다. 문은 누문식으로 팔작지붕의 2층루이며, 방형의 옹성이 문을 보호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곽에는 암문(暗門)이나 수문(水門) 혹은 수구(水口)가 개설되는 경우가 많은데, 낙안읍성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복원되지 않았다. 옹성은 현재 세 곳의 문에 복원되어 있으며 그 형식은 모두 사각형이다. 동문 쪽의 옹성은 성벽에서 안쪽으로 3.9m 정도 나와서 ‘ㄱ’자로 꺾여 바깥쪽의 길이가 16m에 이르며, 높이는 4.1m 정도이다.
여장은 성곽 전 구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문과 남문의 주변 그리고 옹성에만 있다. 치는 4개소에 있으며 형식은 사각형이다. 그 위치가 동문의 좌우와 동벽과 남벽의 모서리 부분, 동벽과 북벽의 모서리 부분 등으로 왜구들이 들어올 해안 쪽을 향해서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낙안읍성의 해자(垓字)는 16세기 전반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언제부터 현재와 같은 해자가 굴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잘 정비되어 있다.
[전통문화 체험 장소로서의 낙안읍성]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낙안읍성은 읍성의 방어시설인 성곽, 행정시설인 동헌, 민가, 시장 등의 시설물이 있고, 실제 민가에서는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각종 행사와 민속이 어우러져 있어 옛 문화를 여유롭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전통을 관람하기 위해 연간 120만 명의 관광객이 낙안읍성을 방문하고 있다. 현재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상태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낙안읍성과 같이 복원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수문장교대식, 국악, 판소리, 사물놀이 등 전통문화와 생활상까지 복원되어 다양한 민속체험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곳도 드물다. 아울러 낙안읍성은 초가로 이루어진 민가에서의 숙박과 남도 음식을 맛볼 기회를 제공하여 온몸으로 조선시대 읍성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