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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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禮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집필자 | 한정수 |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후 장례를 지내기까지 수반되는 의례.
[개설]
상례(喪禮)는 일생 통과 의례 중의 하나로서, 인간의 숙명적인 마지막 길에 예를 갖추어 보내드리는 절차를 말한다. 상례는 죽음을 맞이하여 그 주검을 거두어 땅에 묻기까지 가족과 근친들이 슬퍼하며 근신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관혼상제의 사례(四禮) 가운데 하나인 상례의 절차는 복잡하고 엄숙하였다. 예전에는 석 달 또는 3년간에 걸쳐 상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경기도 양주 지역의 상례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주와 호상, 빈소, 상복 등을 갖추어 슬픔을 다하는 예를 올리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전통 사회에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 수용 이후 유교식 상례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의 확산에 따라 기독교식 상례가 점차 공존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상례 절차가 간소화되었고 전문 상례·장례 수행을 위한 상조 회사 등이 성행하면서 상례는 크게 변화하였다.
[절차]
양주 지역의 전통적인 유교식 상례 절차는 대략 초종(初終)→ 초혼(招魂)→ 염습(殮襲)→ 성복(成服)→ 발인(發靷)→ 우제(虞祭)→ 담제(禫祭) 등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사람이 죽으면 초종(初終)이라 하여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를 보내고 장례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혼을 부르는 ‘초혼’을 하며 사자의 밥을 차려 놓고 자손들은 머리를 풀고 곡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시신을 깨끗이 씻고 수의(壽衣)를 입히는 습(襲)을 한 후에 영좌(靈座)를 설치하고 혼백을 모신다.
다음에는 소렴(小殮)을 행하는데 시신을 베와 이불로 싸서 처음으로 묶는 것으로, 이때 상주(喪主) 이하 모두는 곡(哭)을 한다. 소렴이 끝난 다음날에는 대렴(大斂)을 하는데, 시신을 큰 이불로 싸서 묶고 임시로 관을 만들어 입관하는 의식이다.
대렴 뒤에는 ‘성복’을 하는데, 상주를 비롯하여 근친들이 각각의 복제에 따라 상복을 입는 것이었다. 본래 빈소 조문은 성복을 하기 전에는 상주에게만 인사하고 시신에는 절을 하지 않았다. 성복 후에는 먼저 고인의 영좌 앞에서 곡을 하고 두 번 절한 뒤 상주와 맞절을 하였다.
시신을 장지로 모시기 위해 상여로 옮긴 뒤에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는데, 이를 발인제(發靷祭)라고 한다. 이것이 끝나면 관을 상여에 싣고 장지로 향하는데, 장지로 가는 도중에는 노제(路祭)를 올리고 시신 매장 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빈소에 영좌를 모신다. 삼우제를 지낸 지 100일이 지나면 졸곡하여 곡을 마친다. 고인이 죽은 지 1년이 되면 소상(小祥), 2년이 되면 대상(大祥)을 지내며 대상 후 두 달이 지나면 ‘담제’를 행하였다. 마지막 담제 한 달 후 길제(吉祭)를 지내고 나면 비로소 상주와 근친들은 일반인이 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양주 지역에서 임종 전 집안 식구를 모두 불러 안방의 가구는 모두 밖으로 내놓았다. 사람이 죽으면 부고를 알리면서 초상 치를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초복을 행하고 사자상(使者床)을 차려 대문 앞이나 행랑채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임종 후 시신은 염을 하는데 쌀을 입에 세 숟가락 넣었다. 이때 “천 석이요, 이천 석이요, 삼천 석이요.”라 한다. 숟가락은 남자의 경우 미루나무나 대나무 숟가락을, 여자의 경우는 버드나무 숟가락을 사용하였다.
염이 끝나면 성복하고 성복제를 지내며 문상객을 받기 시작했다. 출상 준비를 하다 상여가 나가기 전에 이르면 대떨이를 하고 상여꾼들에게 한 턱을 내어 위로하였다. 대떨이는 호상인 경우에만 하는 빈 상여 놀이로서, 이를 조적이라고도 하였다. 발인 때 시신은 머리 쪽이 먼저 나가며, 상여는 대개 12인용을 썼다. 호상인 경우는 추가하여 24명이 매기도 했다.
장지에 이르러 하관할 때에는 칠성판을 놓고 시신을 놓은 다음 홍대를 덮었다. 관은 함께 묻지 않고 태웠으며, 명정이나 예단 등은 함께 묻었다. 봉분을 만들 때는 달구질을 하였다. 봉분을 만든 다음에는 좌로 한 바퀴 반, 우로 한 바퀴 반을 돈 다음 산소를 내려온다. 이때에는 왔던 길로 가지 않았으며, 상주는 뒤돌아보지 않도록 했다.
장례 후에는 안방이나 대청에 상청을 차려 3년 동안 식사 때마다 메를 올렸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 차례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산소를 찾았다. 장례 후 3일째 되는 삼우 때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묘소에 가서 지냈다. 상복은 탈상 때 모두 불에 태웠다. 그러나 최근 양주 지역의 상례는 점차 간소화되고 있다. 특히 병원이나 장례식장 빈소 등에서 이를 행함으로써 상복도 서양식과 습합되고 있으며, 시신의 경우도 화장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절차를 도와주는 전문 상조 회사까지 성행하여 양주의 상례 풍속은 점차 쇠퇴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