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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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鏡波臺 |
영어음역 | Gyeongpadae |
영어의미역 | Gyeongpadae Height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6-1 황산강변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영옥 |
성격 | 대(臺)|명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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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6-1 황산강변 |
소유자 | 개인[2008년 2월 22일 물금읍사무소 직원과의 통화에서, 토지대장에 산6-1번지 전체가 개인소유로 되어 있는데, 소유자의 성함은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대(臺).
[개설]
경파대는 조선 고종조 사인(士人) 정임교(丁壬敎)가 향토의 사우(士友)들과 수창(酬唱)하던 승경지(勝景地)다. 정임교는 이황(李滉)의 문인인 고암(顧庵) 정윤희(丁胤禧)[1531~1589]의 후손으로, 자는 남서(南瑞), 호는 매촌(梅村), 일명 규열(奎烈)이라고도 하며,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정임교는 양산향교의 문묘 중흥에 일조하여 유학의 창성(昌盛)을 도모하였다.
정임교의 행보는 1898년 양산군수 임철재(任喆在)가 쓴 양산향교 「대성전중수기(大成殿重修記)」에 “군내의 사인 정임교와 유기윤(柳淇潤)이 재물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해 자금을 모아 공사를 시작했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임교는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 사헌부 감찰, 연일현감(延日縣監) 겸 진주진관병마절제도위(晋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건립경위]
경파대는 양산을 흘러가는 황산강(黃山江, 낙동강) 연안의 한 암벽에 ‘경파대(鏡波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절승지다. 조선 말기 고종 때 양산향교 대성전(大成殿) 중수에 연금(捐金)했던 사인(士人) 정임교(丁壬敎)가 만년에 양산에 복거(卜居)하면서, 문창후(文昌侯)와 최치원(崔致遠)이 유상(遊賞)했던 임경대(臨鏡臺)를 간간이 올랐다가, 우연히 임경대의 수백 보(步) 아래쪽에 위치한 한 암벽을 차지하고 ‘경파대’라 이름한 뒤 날마다 수삼(數三)의 벗들과 함께 상영(觴詠)하였다.
‘경파대’라는 명칭은 당시(唐詩) 「채련곡(採蓮曲)」에 “거울 같은 물 바람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鏡水無風也自波)”고 한 즉경(卽景)을 상기해서 붙인 것이다. 정임교는 이곳에서의 창화(唱和)를 매우 즐겨 “만년의 낙(樂)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경파대의 주인이라 자서(自署)하여 「경파대기(鏡波臺記)」를 지었다.
[위치]
경파대는 물금읍 물금리의 낙동강변에 접해 있다. 최치원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오봉산(五峰山)의 임경대와 거리가 가깝다.
[형태]
경파대는 강물과 접해 있는 깎아지른 듯한 자연 암벽 누대로, 암벽 윗면은 넓고 평평하다. 황산강과 바로 접해 있는 암벽에 ‘鏡波臺’라는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경파대는 양산시 물금을 흐르는 황산강 연안의 절승지로 만년을 임천에서 소요했던 조선의 한 선비인 정임교에게 사랑받은 곳이다. 정임교가 찬한 「경파대기」가 『양산의 누정재지』와 『양산군지』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