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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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致寬 |
이칭/별칭 | 자율(子栗),퇴암(退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639년 11월 14일 - 신치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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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2년 - 신치관 무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신치관 선전관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92년 - 신치관 삼척영장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707년 - 신치관 함경남병마우후에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719년 6월 9일 - 신치관 사망 |
묘소|단소 | 신치관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
성격 | 무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산 |
저술 | 퇴암일고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무인.
[개설]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시조는 고려 인종(仁宗) 때 중국에서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한 후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신경(辛鏡)이다.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8세(世) 전교령(典校令) 신지화(辛至和)의 아들 대에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등으로 분파(分派)되었는데, 경상북도 영천에 세거하는 영산 신씨는 초당공파 후손이다.
종사랑참봉(從仕郞參奉) 신언륜(辛彦倫)이 영천 입향조이니 신치관(辛致寬)의 5대조이다.
[가계]
신치관(辛致寬)[1639~1719]의 본관은 영산. 자는 자율(子栗), 호는 퇴암(退嵒)이다. 고조는 장사랑(將仕郞) 신진(辛軫)이며, 증조는 신응주(辛應周), 조부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 신택룡(辛澤龍)이다. 신치관의 아버지는 사복장(司僕將) 신익우(辛益祐)이며, 어머니는 진주 하씨(晋州 河氏)로 하달해(河達海)의 딸이다.
부인은 인천 이씨(仁川 李氏)로 통덕랑(通德郞) 이문황(李文煌)의 딸이며, 슬하에 4남을 두니 통덕랑(通德郞) 신덕규(辛德奎)와 신성규(辛聖奎), 신남규(辛南奎), 신동규(辛東奎)이다.
[활동 사항]
신치관은 1639년(인조 17) 11월 14일에 태어나 1719년(숙종 45) 6월 9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72년(현종 13) 무과에 올라 1675년(숙종 원년)에는 부장(部將), 1677년에는 주부(主簿), 1678년에는 선전관(宣傳官), 1689년에는 첨정(僉正), 1690년에는 충청도 병마우후(兵馬虞候), 1691년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1692년에는 삼척영장(三陟營將), 1707년에는 함경남병마우후(咸鏡南兵馬虞候)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의금부의 당직으로 있었는데 궁궐에 불이 나서 뜨거운 열기가 창천(漲天)하여 사람들이 감히 그곳으로 가지를 못했는데, 신치관이 긴 대나무에 물에 적신 옷을 걸고 흔들어 뮬을 뿌려 여러 위사(衛士)들을 구출하였다.
숙종이 높은 누각에서 이 광경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두터운 상을 내리고 승진하도록 명하였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2권 1책의 『퇴암일고(退嵒逸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뒷산에 유좌(酉坐) 향으로 있으며, 형조참의(刑曹參議) 정중기(鄭重器)의 갈문(碣文)이 있다.